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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음식 - 박재은의 음식 이야기 - 주왕산에서 찾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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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음식 - 박재은의 음식 이야기 - 주왕산에서 찾은 가을

입력
2006.10.26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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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머리에 스치는 노랫말이 몇 개나 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고, 고독의 계절이고, 국민 누구나 시인의 마음이 될 수 있는 센치한 계절이라고 우리는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구가 변하고, 하늘이 오염되더니 가을이 짧아지다 못해 없어지려 한다. 파란 하늘 아래 가을바람이 싸하게 불고 거리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멋진 계절은 이제, 섭씨 27도를 웃돌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10도로 뚝 떨어지는 이상한 기간이 되고 있다. 사라져가고 있는 가을을 찾고 싶어서 나는 산으로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도 경북의 주왕산에는 여느 가을처럼 세 개의 폭포가 흐르고, 낙엽이 쌓이고 있었다.

♡ 사과

주왕산 입구는 때마침 ‘청송사과축제’ 기간이었고, 덩달아 주왕산에도 사람들이 북적댔다. 산에 들어가 출출해지면 먹으려고 사과 몇 알을 배낭에 챙기고,‘아침밥 든든히 먹길 잘했네!’하면서 산 입구를 걸었다. 아침밥 얘기를 한 까닭은 산 입구에 맛있어 보이는 먹을 거리가 즐비하였기 때문. 철 맞은 노란 국화를 띄운 ‘송이막걸리’, 봄에 잘 말려 둔 무공해 산채를 조물 양념하여 듬뿍 올린 비빔밥, 기름이 번드르하게 지져내는 파전…. 공기는 쌀쌀한데 햇살은 맑고 쨍해서 정말 산행을 집어치우고 밥집 평상에 자리나 잡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산에 들어 묵묵히 걷다 보니 정말 그 얼마나 어리석은 유혹이었는지 금방 깨닫게 되었다. 무거운 등산화를 한발 한발 디딜 때 마다 ‘폭신 사각’ 밟히는 낙엽길 하며, ? 뻗은 소나무가 뿜어내는 100%의 피톤치드(phytoncide;수목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발산하는 천연 항균물질)까지 맛이 아주 기가 막혔으니 말이다.

솔 냄새를 맡기 위해 숨을 크게 쉬면서 성큼 걷다보니 어느새 주왕산 제1폭포를 지나 두 번째 폭포가 눈앞에 있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려 배낭을 내리고 물을 마셨다. 제3폭포를 지나 이십 여분 빠른 걸음을 쳤더니 ‘내원마을’에 도착했다.

애초 나의 목적은 이 마을 사람들을 만나 몇 마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다. 작년 이 맘 때 주왕산 취재를 다녀 온 남편이 내원 마을에서 만난 할머님 이야기를 들려 준 일이 있었다. 주왕산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내원마을에 40년째 살고 계신다던 할머님의 사연이 내 가슴에 닿아서 직접 뵙고 사과도 한 알 나눠 드리고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을에 사람들이 없었다. 집터만 간간히 눈에 띌 뿐, 언젠가 철거를 당하면 꼼짝없이 산을 내려가야 한다고 한숨을 쉬셨다는 할머님의 걱정이 들어맞았던 것일까.

초라한 분교 앞에 나뒹구는 걸상을 바로 세워 앉아 사과나 꺼내 먹기로 했다. 아삭아삭, 참 맛도 좋다. 사라져 간다고 투덜댔던 가을의 맛이 사과 한 알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빨간 색과 단 냄새는 햇살 맛, 풋풋한 아삭함은 바람 맛, 혀 밑으로 고여 드는 과즙은 여름 내 내린 비 맛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아삭거리며 사과 씹는 소리만 들리자 어느 빈 집 기둥에 매달려 있던 백구 한 마리가 마구 짖어댔다.

♡ 송이버섯

산을 내려오는 길은 아쉽기만 했다. 다시 아스팔트로 돌아간다는 쓸쓸함이 가득 했다. 산 입구로부터 야영장과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또 20여 분을 걷게 되었는데, 아까 내 코를 홀리던 기름 냄새나 술 냄새보다 더 눈에 띄는 먹거리들이 있었다. 끝물인 머루, 가지째로 파는 생오미자, 알이 탄탄해 보이는 오가피 등이 그들이었다. 서울 가서 술 담그겠다고 우기면서 기어이 한 봉지씩 다 샀다. 거기에다 맵고 단단한 경상도 고추까지 몇 천원 어치를 챙기다보니 내원마을부터 울적해졌던 기분이 활짝 폈다.

산 입구를 걷다가 운이 좋으면 송이버섯을 파는 할머님들을 만날 수도 있다. 덜 핀 송이, 더 핀 송이의 품질 차이는 좀 있을지 몰라도 일단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에 그만하면 횡재가(價)다. 할머님들의 송이가 다 떨어졌으면 주왕산에서 차로 십 여분 거리에 있는 진보면의 시장에서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취사도구가 있다면 이름난 경상북도 소고기를 한 덩어리 사서 송이 스테이크를 맛 볼 수도 있다. 담백한 맛을 배가시키기 위해 얇게 썬 가지와 고기를 함께 굽는데, 고기의 기름기를 가지가 쫙 빨아들여 좋은 매치를 이룬다. 뜨겁게 달군 팬에 가지를 깔고 고기는 앞, 뒤로 지지면서 소금, 후추 간이나 사과즙(혹은 유자즙)과 양파 즙에 섞은 간장 소스로 간을 맞춘다. 불에서 내린 다음 여전히 뜨거운 고기 위에 아주 얇게 썰어서 닭고기처럼 길이로 찢은 송이를 가닥가닥 올린다. 그러면 종잇장 같은 송이가 고기의 열기로 살짝 익는다.

서울로 돌아와 이렇게 원고를 쓰다 보니 맛 좋은 산 공기에 취해 침이 잔뜩 고인 채 배어물던 송이버섯이 다시 떠올라 괴롭다. 아!

가을의 맛을 잔뜩 쥐고 있는 산으로 조만간 또 들어가고 싶다.

음식 칼럼집 ‘육감유혹’ 저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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