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은 죽지않았다. 패션디자이너 이신우(65ㆍ본명 이창우)씨. ‘오리지날리’라는 이름으로 20세기말 한국패션의 선봉에 섰고 파리컬렉션 등 해외무대에도 가장 먼저 진출해 한국패션의 세계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가 8년에 걸친 악몽 같은 세월을 딛고 다시 대중앞에 나선다. 11월 1일 서울컬렉션 오프닝 무대다. 1998년 외환위기가 당대 최고의 패션기업이었던 ㈜이신우를 침몰시킨 이후, 그해 6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열었던 마지막 패션쇼를 끝으로 대중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던 이씨가 재기의 첫발을 내딛는 무대라는 점에서 패션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컬렉션 준비에 한창인 이씨를 서울 강남 신사동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벽에는 출연 모델들의 프로필이, 작업실 한 쪽에는 패션쇼에 선보일 의상들이 디자이너의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며 죽 걸려있는 부산한 작업실. 딸이자 동료 디자이너인 박윤정씨와 함께 쓰는 작은 공간에서 이씨는 살이 많이 빠졌지만 참 편안해 보였다.
“남의 눈엔 초라한 멍석일 수 있지만 내겐 최고의 멍석이지요.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고마워요. 다시 신인이 된 기분입니다.”
부도 이후 채권단에 자신의 이름에 대한 상표권마저 빼앗긴 불행한 디자이너이지만 옷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세월 속에 농익은 것 같았다. “이 나이에 패션쇼라니 욕심 아닌가 싶기도 했다”는 그는 그러나 “옷이 내게는 숨쉬는 것과 같으니까, 내 안에 아직도 쏟아내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옷 만들기를 놓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안 좋은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고 지난 8년은 이씨에겐 신고의 세월이었다. 한국적 아방가르드 패션의 대명사격이었던 ‘오리지날리’를 비롯 ‘영우’ ‘쏘시에’ ‘이신우’ ‘이신우 옴므’ 등 굴지의 브랜드를 속속 출시하며 승승장구했던 사업체가 부도나면서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도 많이 당했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단 브랜드가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통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이제 내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수 밖엔 방법이 없다”는 이씨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스쳤다.
2004년엔 평생의 반려자 박주천(66ㆍ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씨가 불법정치자금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대학을 중퇴할 정도로 사랑해 결혼한 남편의 불행은 뼈에 사무쳤다.
“참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젠 미워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어요. 서로가 더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생각하지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까 오히려 홀가분하데요. 내 속에서 우러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소박하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옷을 만들자고 다짐합니다.”
재기 무대에는 모두 45벌의 옷을 선보인다. 남성복과 여성복이 함께 있다. 브랜드 명은 ‘시누(CINU)’로 정했다. 남ㆍ여성복을 아우른 데는 오랜 어둠의 터널을 지나 도달한 ‘화해와 조화’의 정신이 바탕이 됐다.
“흑백의 강렬한 대비 보다 흑백이 조화를 이루는 회색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남녀도 마찬가지죠. 가부장의 시대가 지나고 남녀의 차별이 무색한 시대이니까 어느 한쪽의 성이 들러리가 되지않는, 눈에 보이지않아도 따뜻한 사람 사이의 교감을 이야기하는 무대가 됐으면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지만 패션쇼를 지원해줄 조직도 없는 상태라 이씨는 작업실 한쪽에서 초청장을 봉투에 넣는 일까지 일일이 직접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근심은 재기무대가 결정됐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던 박 전의원이 열흘 전 중환자실에 옮겨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박 전의원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폐섬유화증과 협심증이 겹쳐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상태다.
“아침 저녁으로 면회를 갑니다. 정신이 날 때는 말은 못하고 손으로 ‘일’이라고 허공에 쓰시곤 해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시는 거죠. 그분을 위해서라도, 저를 믿고 지켜보시는 많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새로 태어난 ‘시누’는 정말 잘 키워보고 싶습니다.”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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