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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면서] 내가 본 한국의 장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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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면서] 내가 본 한국의 장례문화

입력
2006.10.2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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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유학 오기 전에는 어린 학생이었기에 중국에서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직장을 다니고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장례식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한국의 장례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이번 추석에 사랑하는 가족인 형부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내고 나서였다.

● 유족 배려하는 '의도된 시끄러움'

가족이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에 각각 떨어져 살다보니 한국에서의 몇 안 되는 가족은 서로 많이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동안 가장 많이 의지했던 분은 바로 형부였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한국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갈등하다가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내게 찬바람이 살을 에는 겨울 바다를 보여주며 인내를 가르쳐 주시던 형부, 사소한 일까지도 세세히 챙겨주시던 아버지 같은 형부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미어졌다. 장례식을 치르는 그 며칠 동안 나는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 그리고 살아가면서 흘려야 할 눈물을 모두 쏟아낸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형부의 사망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녹초가 되어 장례식을 치르던 첫날, 날이 저물어 밤이 되자 함께 일을 도와주시던 분이 화투를 가져와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문상객들은 화투를 받아들고는 여기저기 모여앉아 평소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화투놀이를 시작했다.

연세가 다 되어서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일지라도 그 가족의 슬픔이 작지 않을 텐데 어린 자식 셋을 두고 마흔의 젊은 나이에 사고로 돌아가신 형부의 장례식을 치르는 우리 가족이나 문상 온 지인들의 슬픔은 더 이상의 표현이 필요없었다.

그런데 이런 슬픔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도 화투놀이를 하며 간혹 웃음을 보이는 그들에게 나는 심한 거부감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는 어떠한 장례식이든 간에 문상객들은 모두 경건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유가족들을 대하여야 하며 그것만이 문상의 진정한 도리라고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장례문화를 알 턱이 없는 내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손님들의 이해할 수 없는 놀이를 막 제지시키려는 순간, 화투를 나누어주신 그분께서 나를 장례식장 밖으로 조용히 데리고 나갔다.

그의 설명인 즉 한국인들은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유가족들이 계속 슬픈 생각에만 잠겨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화투라는 놀이를 통하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 깊은 헤아림 비로소 알게 돼

한국 방식의 배려문화,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그러나 슬픔을 잠시나마 잊는 데에 또 그토록 사무치게 필요했던 고마운 시끄러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목이 콱 메어오며 슬픔과는 또 다른 의미의 눈물이 북받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의 장례식장에서의 화투놀이를 보면서 유가족들의 침통한 슬픔에 대한 문상객들의 인간다운 헤아림을 비로소 읽을 수 있었다. 아마 형부의 영혼이 살아계신다면 분명 그 시끄러운 화투놀이 소리에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 글을 사랑하는 형부에게 바친다.

추이진단ㆍ대진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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