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하나 더 달린 것 같은 큰 키에 야비한 반칙도 불사하던 일본의 레슬러들. 반면 이리저리 고통스럽게 내던져지던 왜소한 체구의 한국 선수들.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던 국민들에게 ‘박치기 한 방’은 절망 속의 희망이자 짜릿한 쾌락이었다.
# '국민스포츠'의 영웅… 말년엔 장기투병
험상궂은 거구의 레슬러들을 추풍낙엽처럼 자빠뜨렸던 김일의 박치기. 고단한 삶이 지배하던 1960~70년대 ‘박치기 왕’ 김일이 등장하는 프로레슬링은 ‘국민 스포츠’였다.
김일은 1929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로선 큰 키였던 185㎝의 건장한 체구를 갖춘 김일은 지역의 씨름대회를 석권하며 이름을 알렸다. 여순반란 사건과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고생했던 김일은 56년 여수에서 선원들을 통해 얻은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의 기사를 읽고 난 뒤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다.
김일은 이듬해인 57년 도쿄 역도산체육관에 문하생 1기로 들어가게 됐고, 여기서 ‘필살기’인 박치기 기술을 익혔다. 함경도 출신의 역도산은 일찍이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절감하고, 김일에게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히라”고 명령했다.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 이름으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김일은 탄탄대로를 밟으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63년 12월 역도산이 칼에 맞던 날 공교롭게도 김일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생애 처음으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챔피언에 올랐다. 경기에서 지지 않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여긴 김일은 운동에 전념, 72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프로레슬링계를 평정했다. 30여년의 현역 생활 동안 3,000여 차례 경기를 치른 김일은 무려 20차례나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다. 라이벌인 안토니오 이노키, 압둘라 부처 등과의 경기는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된다.
야구광이었던 김일은 일본 프로야구의 강타자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의 ‘외다리 타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박치기 자세를 완성했다. 최근 방송에 출연한 김일은 “왕정치가 현역 시절 발을 들고 타격하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체중을 실어야 하는구나’라고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후 머리를 뒤로 젖힌 채 한쪽 발을 들어 상대방에게 체중을 실어 ‘박치기’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프로레슬링의 전설로 군림했던 김일이었지만 그의 말년은 사업 실패와 투병으로 얼룩졌다. 80년대 중반 손을 댔던 활어 수출 사업 등이 잇따라 실패한데다 박치기 후유증과 노환, 당뇨병 등에 시달렸다.
다행히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도움으로 지난 94년부터 13년째 무료 입원 치료를 받아왔지만 고혈압, 하지 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이 겹친 데다 최근엔 빈혈증세까지 보이며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김일은 지난 2월 “레슬링은 쇼”라는 발언으로 원수처럼 갈라섰던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과 극적으로 만나 화해했고, 3월엔 일본에 건너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 한국 야구 대표팀을 격려하는 등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정부는 김일에게 지난 94년 국민훈장 석류장과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했다.
■ 빈소 이모저모
○…김일이 26일 낮 지병으로 별세하자 그가 입원치료를 받았던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아들 수안(56)씨와 딸 애자(61), 순희(59)씨를 비롯해 김씨의 제자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프로레슬링 관계자 30여 명은 김씨가 숨질 당시 을지병원 3층 중환자실 앞에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일본 언론서도 취재 관심
○…일본 언론에서도 한때 '박치기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일씨의 투병 생활에 관심을 나타냈다. 김씨의 상황을 지켜 보기 위해 을지병원을 찾은 일본 일간지 '닛칸 겐다이'의 마사키 다치가와 기자는 "1970년대 초 김일씨는 역도산과 함께 매우 유명한 프로레슬링 선수였다"면서 "일본의 60~70대들은 아직도 그의 근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마사키 기자에 따르면 김씨는 일본에서 '박치기' 기술로 활약할 당시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전설적인 사나이'를 뜻하는 '오오키 긴타로'라는 별명을 가졌었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 '레슬링은 쇼' 사건 후/ '앙숙' 장영철과 41년만에 극적화해
삶이 저물어감을 느꼈던 것인가. 무려 41년간 원수처럼 지냈던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설적인 두 영웅이 극적으로 화해를 한 뒤 약속이나 한 듯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박치기왕’ 김일과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은 6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양분했던 인물들. 역도산의 제자로 ‘해외파’를 대표했던 김일과 ‘국내파’의 간판이었던 장영철은 ‘국민스타’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른바 “레슬링은 쇼” 발언 사건으로 인해 둘은 원수처럼 갈라서고 말았다. 지난 65년 11월25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일본의 오쿠마가 ‘약속과 달리’ 거친 ‘새우꺾기’ 공격으로 장영철을 몰아부친 것. 고통을 견디다 못한 장씨가 매트를 쳤지만 오쿠마의 공격은 계속됐고, 지켜 보던 장씨의 후배들이 링위로 몰려가 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장영철과 후배들은 즉심에 회부됐고, 장영철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고 말해 파장이 일었다. 이후 장영철은 프로레슬링 쇠락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고, 김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41년 동안 물과 기름처럼 지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지난 2월. 김해의 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장영철을 김일이 찾아가 만나면서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린 둘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지난 8월 장영철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김일은 장영철의 빈소를 찾아 오열한 바 있다.
김일, 장영철과 함께 활동했던 프로레슬링 1세대 가운데 천규덕(74)씨는 프로레슬링동호회 고문으로 후배 지도에 힘을 쏟고 있으며 재일동포 출신 여건부(68)씨는 일본에서 투병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