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세련된 정의(定義) 하나는 19세기 프로이센 군사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발설한 "다른 수단들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것이다. 전쟁이 정치의 '계속'이라는 것은,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이 일깨웠듯, 군사부문(전쟁)과 민간부문(정치)이 언제라도 미끈미끈하게 호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글뤽스만은 이 점을 걱정스러워하면서, 군국주의나 '전쟁 신앙'은 민간부문을 복종시키려는 군사부문의 의지에서만이 아니라, 너무도 쉽사리 군사부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민간부문의 자발성에서도 나온다고 부연했다.
● 누가 전쟁의 희생자가 될 것인가
최근 북한 미사일과 핵실험에 관련된 뉴스가 쏟아지면서, 군사부문으로 이끌리는 민간부문의 자발성이 우리 정치권 일각에서 운동량을 키우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전쟁 선동이야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으나,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바로 그 현장이 될 한국에서 민간부문의 군사적 자발성을 목격하는 일은 섬뜩하다.
이들은 전쟁을 정치의 계속으로 여기는 클라우제비츠의 제자이기는 하나, 21세기 전쟁이 19세기 전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잊고 있거나 모른 체하고 있다.
지난 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경우 남한과 미국은 쉽게 북한을 이길 수 있지만 대가가 따른다고 지적했다. 그 대가는 '한국전쟁 때를 능가하는 희생자 수'다. 희생자 수가 설령 그 10분의 1이라 할지라도, 그런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도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이익이 무엇인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쟁에서 폭탄이나 총탄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겨누는 것도 아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던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울대 강연에서 "전쟁터엔 40세가 넘은 사람들만 나가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인용하며 최근의 군사적 대결 분위기를 경계했다. 전쟁의 가장 큰 불공평함은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과 그것의 가장 큰 피해자가 분리된다는 점이다.
천연덕스럽게 '원상 상륙'을 운운한 50대의 공 아무개, 송 아무개 의원이 죽음을 무릅쓰고 원산상륙작전에 참가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게다. 기성세대가 결정한 전쟁을 가장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젊은이다.
그런데 젊은이들 모두가 평등하게 전쟁의 일차적 희생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유달리도 몸이 부실한 경우가 많아 징집 면제율이 높은 한국사회 상류층 자제들이, 전쟁이 터진다 해서 뒤늦게 동원돼 일선전투에 참가하리라고도 내다보기 어렵다.
전쟁의 일차적 희생자는 개전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의 자식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주전론자들에게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상상력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식이나 명예심조차 없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치다꺼리를 한국군이 하도록 결정한 정부와 국회의 결정에 한국 여론이 거칠게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전쟁이라는 재앙에 대한 상상력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라크와의 지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를 넓히며 그 상상력 부족을 거들었을 테다. 그것은 물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을 상대로 한 주전론은 그런 부끄러움마저 사치로 만들 치명적 경솔함이다. 주전론자들이 거론하는 전쟁에서 폭탄이 떨어질 곳은 바그다드가 아니라 서울이기 때문이다.
● 전쟁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후세인이 형편없는 망나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듯, 지금 대북(對北) 군사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김정일이 파렴치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시는 후세인 하나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느라 군인 민간인 가리지 않고 수십만의 사람을 이라크에서 죽였다.
이제 김정일이라는 독재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이라크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을 한반도에서 죽여야 하나? 전쟁은, 더욱이 영향력 있는 공인이라면, 쉽사리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북핵 사태 책임의 적어도 절반이 부시 행정부에 있다는 점을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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