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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는 이종석 통일, 참여정부 외교안보 정책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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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는 이종석 통일, 참여정부 외교안보 정책 '상징'

입력
2006.10.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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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참여정부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2인자로 불려왔다. 그만큼 그는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해왔다. 차관급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으로 2년 10개월, 통일부 장관으로 8개월 동안 일하며 참여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그러나 참여정부 외교안보분야 실세라는 인식 때문에 야당과 보수세력의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실 이 장관의 공직 진출은 김대중 정부 시절 임동원 전 대통령 특보와 맺은 인연 덕분에 시작됐다. 촉망 받는 북한 연구자였던 이 장관은 1993년 조선노동당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94년 9월 세종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당시 통일부 차관에서 물러나 연구소에 나오던 임 전 특보와 인연을 맺었다.

임 전 특보는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브레인 역할을 했고, 98년 김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국정원장 대통령특보 통일부 장관 등의 요직을 섭렵했다. 이 기간 학자였던 이 장관도 <현대 북한의 이해> , <분단시대의 통일학> 등의 저서 집필과 활발한 언론 기고를 통해 ‘햇볕정책 전도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동시에 임 전 장관을 외곽 지원하면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하는 등 햇볕정책 입안과 정책 집행을 도왔다.

2002년 말 노무현 캠프의 외교안보분야 자문 학자그룹에 참여하면서 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노 후보가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으로 일하게 됐다. 이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2003년 3월 NSC 사무차장이 됐다.

그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북한 전공 학자로서의 전문성, 논리적 사고와 화술, 성실성, 외부의 공세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을 아꼈다. 노 대통령은 유명무실한 조직이었던 NSC 사무처에 안보관련 정보 수집ㆍ분석과 정책 조정 업무 등을 맡기고 이 장관을 곁에 두고 일했다. 그도 ‘7 to 11’(오전 7시 전에 출근해 오후 11시 이후 퇴근)을 반복하며 노 대통령에 대한 충심을 발휘했다.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 분야 최측근으로 자리한 만큼 이 장관이 처리한 업무는 주한미군 감축,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용산 미군기지 이전, 전략적 유연성 협의, 한미 작전계획 변경 등 다양했다. 야당이 그를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자주파’로 몰아세우면서 그는 색깔론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이 장관은 “나는 친미도 반미도 아닌 실용주의, 용미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 야당의 사상 공세를 뚫고 취임한 통일부 장관 자리는 그와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4월 18차 평양 장관급 회담에서 납북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합의를 이끌어내 각광을 받는가 싶더니 그 이후 시련의 연속이었다. 5월 경의선^동해선 철도 시험운행이 북한 군부의 비협조로 무산되고, 미국의 대북 압박이 거세지면서 7월 미사일 발사, 10월 핵실험 등 북한이 걷잡을 수 없는 행동에 나서자 결국 장관직에서 중도 퇴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25일 기자간담회를 마친뒤“핵실험 상황만 아니면 마음이 가볍겠는데…”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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