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하얀 성'에는 꿈과 현실, 환상과 실재가 엇갈리는 순간을 포착한 아름다운 대목이 나온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을 통치하던 술탄은 유럽을 정복하기로 결심한다. 술탄의 병사들은 이스탄불에 노예로 사는 한 서양인의 도움을 얻어 제작한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고 유럽을 향해 진군한다.
● 역사적 소재에 특유의 상상력
무거운 대포를 끌고 높은 산과 늪지대를 통과하며 동유럽의 변방을 헤매던 그들 눈 앞에 어느 날 멀리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하얀 성채가 들어온다.
바위 투성이의 비탈과 어두운 숲을 지나 지는 해의 붉은 빛에 물들어 가는 성을 향해 진격하지만 끝내 그들은 그 성을 정복하지 못한다. 소설 속의 화자는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고백한다.
오르한 파묵은 터키의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그만의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색채와 향기를 갖는 작품을 탄생시켜 왔다. 평이하게 시작된 이야기도 어느 고비를 넘는 순간 인간의 합리적 사유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현기증 나는 영역으로 인도된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터키가 지닌 지정학적 가치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는 이국적인 풍토나 전통을 상품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한계에서 벗어나 동서양의 현대인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심오하면서도 복합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역시 역사적 소재를 취한 또다른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에선 터키의 전통 회화인 세밀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우상을 금지하는 코란의 명령 때문에 회화예술이 발달하지 못한 이슬람 국가에서 그림 장식이 있는 필사본의 삽화를 의미하는 세밀화는 유일하게 화공들에게 자유로운 재능의 발휘가 허락된 영역이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를 왕래한 사신 등을 통해 서양의 원근법과 초상화가 전래되자 술탄의 궁정에도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재래의 세밀화 기법을 고수하려는 측과 과감히 새로운 서양식 기법을 수용하려는 측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여기에 화공들 간의 원한과 질투, 종교적 율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 등이 개입하면서 피비린내나는 살인이 벌어진다.
작품은 스스로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점차 희미해져가는 시력으로 궁정 서고에 은닉된 어마어마한 양의 세밀화 걸작을 응시하는 한 노화가의 이야기를 통해 서양의 침공 앞에서 터키의 고전 문명이 처한 운명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 한 작가가 바꿔놓은 터키의 이미지
오르한 파묵 이전의 터키는 우리에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나 '욜' 같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폭력적인 감옥과 억압적인 군사통치, 봉건적이기로 악명 높은 가족구조의 이미지로 집약되었다.
어쩌면 파묵이라는 한 작가의 등장과 더불어 비로소 터키는 국제적으로 문명국가의 대열에 들어선 나라로 공인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 뛰어난 작가가 자기 조국과 언어에 얼마나 큰 영광을 가져올 수 있는지 세계문학사는 증명하고 있다. 문학에 대한 경의를 차츰 잃어가는 이 땅에서 파묵 같은 큰작가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남진우 시인ㆍ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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