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북한 식량사정을 걱정하는 발표가 나오기 마련이다. 올해는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 핵 실험 다음날인 10일 국제사회의 제재 때문에 북한 어린이들이 진짜 혹독한 겨울을 맞을 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한국에서 북한 식량난에 대한 설명은 이런 식이 많다. '사회주의권 붕괴로 대외 교역이 끊어진 데다 자연재해가 겹쳐 식량난이 왔다. 식량난과 경제위기, 고립 때문에 체제불안이 심해지자 체제보장을 받아내기 위한 협상카드로 핵 개발에 매달렸다. …'
외국에는 북한 식량난과 핵 개발의 선후관계가 전혀 다른 설명도 있다. 옛 소련 자료로 냉전을 연구하는 일본의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는 2004년 출간한 <아시아 냉전사> 에서 공산권 국가의 핵 개발이 바로 굶주림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아시아>
중국의 1950년대말 핵 개발과 대약진운동 시기에 발생했다는 2,000만~3,000만명, 1990년대 북한 핵 문제의 시작과 추정 200만명 아사(餓死)가 흡사하다는 주장이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핵 개발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희생이 발생했고, 기아와 핵 개발의 연관성은 반드시 지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모토마이가 책에 밝혔듯이 아사와 핵 개발의 관계는 러시아 학자 V. F. 지마가 1996년 발표한 <1946~47년 소련의 기근>에서 처음 지적했다. 소련 기밀자료를 동원해 지마는 소련에서 이 시기 소중한 자원을 핵 개발에 투입하는 바람에 100만~20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처음에 든 식량난 설명처럼 북한의 내외사정을 헤아려 북한 나름의 합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핵 개발이 '무기용'이 아니라 '협상용'이라던 생각도 여기서 연유한다.
쟁기는 농사용이고 칼은 전쟁용이라는 단순한 상식을 알면서도 녹이면 쟁기가 될 수 있는 칼 만들기는 농사용으로 봐주자는 안타까운 희망 붙들기 였다.
어떻게 든 위기상황을 피하려는 한국에서 이런 희망은 누구나 믿고 싶었다. 그 이름이 포용정책이든, 평화와 번영 정책이든, 엄격한 상호주의이든 한국의 대북 정책은 이런 희망을 함부로 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한은 핵 실험을 했고 핵 무기 보유국이 돼버렸다. 미국의 양자회담 거부가 북한을 핵 실험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은 북한의 핵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한 짧은 시기의 부차적 상황론일 수 있다. 핵 무기를 갖기 위해 아사자가 발생하는 '고난의 행군'을 감수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후대에 규명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누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나라가 아니다"고 스스로 입버릇처럼 말하는 북한의 소위 자주성과 주체성을 무시하는 한국식 이해하기가 너무 깊어져 온 것은 아닐까. 핵 실험과 핵 무기 보유도 협상용이라고 봐주고, 추가 핵실험을 안 하면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김일성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만일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미 제국주의자들이 핵무기를 쓰지 못합니다.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적아가 서로 맞붙어 씨름을 하며 돌아가겠는데 어떻게 핵무기를 쓰겠습니까.
적들이 핵무기를 쓰면 자기편도 죽습니다."(<김일성저작집31> ,1986) 이런 걸 다 아는 북한이니 한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볼 것인가, 다 알고도 사용하리라고 볼 것인가. 김일성저작집31>
신윤석 국제부장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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