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 수순착오라는 게 있다. 결국 반상에 놓이는 돌들은 같지만 어떤 수순으로 놓아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북한 핵실험 사태가 숨 고르기에 들어간 틈에 정부가 두어온 '북핵 바둑'을 중간 점검해보자. 형세가 매우 안 좋다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난다. 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수순착오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 수세에 몰린 한국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던 정부다. 그러나 지금 그런 서슬은 어디 가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사업이라는 곤마 살리기에 급급하고 있는 형국이다.
핵 실험 후 북한을 실질적으로 아프게 할 조치 하나 변변히 취한 것이 없다. 무리수를 두고 나온 북한에 응징은 생각도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국제사회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뭔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핵실험 당일인 9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이 마당에 포용정책만을 계속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겠는가"라며 남북경협사업 재검토의 강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다음날 노 대통령의 어조가 달라졌고 정부여당 내부에서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확대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결국 유엔안보리 결의 채택결과를 봐가며 대응 방향을 결정하기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15일 안보리 결의 채택 직후 반상에 떨어진 정부의 응수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사업의 계속 유지였다. 안보리 결의가 남북경협과 무관하다고 해석한 것이다.
정부가 나라 안팎으로 심하게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동북아 4개국 순방을 앞두고 라이스 장관 자신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레프코 위츠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역할분담이나 한 듯 PSI,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을 정조준해 포화를 퍼부었다. 국제사회의 시선도 냉랭했다.
정부는 부랴부랴 금강산관광에 정부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고 개성공단사업을 확대하지 않으며 PSI 선별적 참여 확대를 검토하겠다는 등의 대응조치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수세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국의 압력과 국제사회의 비판에 마지못해서 내놓은 조치로 비쳤을 뿐이다. 만약 정부가 수순을 바꿔서 안보리결의 이행 의지를 강조하고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우선시한다는 모양새를 취한 뒤 이런 조치를 밟아갔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의 대응수순은 달랐다. 대북제재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중국이다. 그러나 안보리 결의 직후 북중 국경의 화물검색 강화, 대북송금 업무 중단조치를 먼저 취했다.
다분히 형식적이고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의 성격이 강해 보이지만 북한의 핵실험을 응징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대열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갖추기에 충분했다.
그런 뒤 중국은 특사를 북한에 파견해 추가 핵실험 유보, 6자회담 복귀 검토 등의 전향적 자세를 이끌어 냈고 이를 토대로 미국의 양보를 압박하는 수순을 밟았다. 중국에 대해 미국과 국제사회의 평가가 달리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 국제사회로부터 고립 피해야
물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중국과 다르다. 한반도 긴장이 조금만 고조돼도 우리는 민족의 생존이 걸린 전쟁을 걱정해야 하지만 중국은 그렇게까지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는 북한 제재와 그로 인한 긴장 고조 가능성에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제사회와의 공조보다는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지키기 수를 먼저 두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가 노력하면 두 사업을 지켜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면 의미가 없다.
국제사회 공조냐 남북관계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자는 것이 아니다. 수순에 따라서는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아마추어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수를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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