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살림이지만 포장이사를 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요량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12년 전 생각이 난다. 이삿짐 나를 용달기사가 내 방을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책을 상자에 담아놓았을 뿐, 살림살이가 살던 그대로인 방에 어수선히 앉아 있다가 그를 맞았다. "테이프 있죠?" 그는 이내 팔을 걷어붙이고 텔레비전 코드를 감아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어, 좋은 생각이네요!" 내 감탄에 그는 피식 웃으며 전축에도 냉장고에도 같은 처치를 했다. 그는 과묵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때도 거의 포장이사를 한 셈이다.
포장이사 견적을 내러 방문한 사람에게 물었다. "제가 할 일은 뭐죠?" 그가 침착하고 명민한 눈빛으로 방을 훑어보는 짧은 시간 나는 조마조마했다.
아,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라는 그 말 한 마디! "제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감격에 찬 내 말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능하고 너그러웠다. 잘 생긴 청년 한 명과 함께 와서 이사를 맡아줬다. 그들은 좁고 가파른 계단과 긴 골목길 때문에 더 고생스럽게 짐을 옮겨야 했는데도 표정이 밝았다. 고맙고 미안하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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