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경제평론관념을 사랑한 저널리스트, 미적 광채를 띠고 나를 홀린 문장이여…
정운영(1944~2005)은 일급 마르크스 경제학자였지만, 여느 독자들은 그를 화사한 문체의 저널리스트로 더 기억할 것이다. 편저를 제외하면 그가 쓴 경제학 이론서는 벨기에 루뱅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우리말로 옮기고 보완한 <노동가치이론 연구> (1993)와 그 후속편이라 할 유작 <자본주의 경제산책> (2006) 두 권뿐인 데 비해, 신문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1980년대 말 이래 그가 낸 칼럼집은 열 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 칼럼들은 흔히 경제평론이라 부르는 장르에 속했지만, 경제라는 영역 자체의 전방위적 규정력과 필자의 예외적 박학에 기대며 정치 문화 등 사회 전 부문을 향해 더듬이를 곧추세웠다. 자본주의> 노동가치이론>
정운영은 신문 칼럼에 문학텍스트에 맞먹는 미적 광채를 부여한 드문 저널리스트다. 하긴 그의 문체적 사치는 신문 글만이 아니라 본격 논문에서도 절제를 몰랐다. 그 점에서 정운영은 연구자이기 이전에,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문장가였다. 설령 그의 글의 메시지가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흐릿하게 퇴색한다 할지라도, 그의 문장은 한국어가 살아있는 한 또렷이 남을 것이다. 그의 소문난 퇴고벽, 교정벽이 사실이라면, 문장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정운영이 진정 바라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꿈을 이뤘다.
정운영은 우리가 지난 주 엿본 전혜린과 어떤 정신세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유럽의 지적 자장(磁場) 안에 저 스스로 쏠려 들어가는 정신 말이다. 우연찮게도, 두 사람 다 젊은 시절 한 때를 유럽에서 보냈다. 그들은 유럽을 잣대 삼아 세상을 판단했고, 유럽에 미치지 못하는 한국의 낙후성에 절망했다. 그러나 닮음은 그런 껍데기에서 끝난다. 부분적으로는 요절 때문에 전혜린이 지니지 못했던 학문적 훈련과 문필 훈련의 기회가 정운영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정운영은 그 기회를 남김 없이 활용했다. 그래서, 정운영의 글은 전혜린의 글이 그 편린도 보여주지 못한 경지에 이르렀다. 전혜린이 문학에도 학문에도 저널리즘에도 이르지 못했던 데 비해, 정운영은 그 셋 모두를 취했다.
말할 나위 없이, 이런 단순 비교는 불공평하다. 독자들에게 알려진 정운영의 글은 40대 이후의 글인데, 전혜린에게는 그 40대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31년을 조금 더 살고 자살한 전혜린에게는 30대라는 것조차 거의 없었다. 어떤 사람의 장년 이후 글을 또 다른 사람의 청년기 글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특히 한국처럼 사회 변동과 언어 진화의 속도가 빠른 사회에선, 공평하지 않다. 세대 차도 헤아려야 한다. 두 사람은 열한 살 차이고, 정운영은 전혜린이 작고하기 한 해 전 대학에 들어갔다. 1960년대 이후의 ‘근대화’라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고 죽은 전혜린과 그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정신을 벼린 정운영의 글을 나란히 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을 모두 에누리해도, 정운영은 전혜린을 저 멀리 따돌린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혜린이 동시대의 또래에 견주어서도 평범한 문필가였던 데 비해, 정운영은 동시대의 또래에서 두드러진 문필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혜린 신화에 맞먹는 정운영 신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다시 말해 전혜린의 유고에 감돌았던 아우라가 정운영의 글에 없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적 부피가 그 세월 동안 꽤 불어났기 때문일 테다.
정운영의 저널리즘 활동이 본격화한 것은 1988년이었다. 그 시점은 상징적이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그 전 해 6월항쟁으로 깨어 기지개를 켜면서 백화제방의 시동을 건 것이 1988년이었기 때문이다. 정운영이 저널리스트로서 닻을 내린 곳은 그 해 창간된 한겨레신문이었다. 그는 1999년까지 이 신문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이것 역시 상징적이다. 한겨레신문은 ‘진보’를 시대정신으로 파악하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한 해직 기자들 손에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군사정권 아래서라면, 또는 1988년 이후에라도 보수 논조가 지배적인 신문에서였다면,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전망에 올라탄 그의 진보적 경제칼럼들이 버젓이 활자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직업저널리스트로서 정운영이 머무른 유일한 거처는 아니다.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70년대 초에 그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기자로 일했고, 2000년부터 작고할 때까지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정운영 칼럼을 화사하게 만든 것은 문체만이 아니다. 고금동서의, 현실과 텍스트 속의 수많은 장면들이 줄줄이 끌려나와 칼럼의 서두나 말미를 장식하며 필자의 박학을 증명하고 글의 때깔을 돋웠다. 그의 칼럼은 의견의 전시장인 것 이상으로 지식의 전시장, 취향의 전시장이었다.
그 지식과 취향이 의견을 압도할 때, 그의 칼럼은 허영의 전시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람강기는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정운영 칼럼의 장점이었고, 그 휘황함으로 더러 논지를 흩뜨려버리기도 하는 단점이기도 했다. 이것은 정운영 칼럼의 앞머리를 으레 장식하는 일화들이 그 칼럼의 논점과 긴밀히 맞물리지 못하고 더러 버성겨 보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 그의 칼럼 논지가, 더러, 깊이 내려앉지 못하고 널따랗게 퍼지곤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바탕 벌이는 그 지식과 취향의 잔치는 독자들을 홀리는 ‘삐끼’ 노릇을 했다. 나도 그 ‘삐끼’에 홀려 정운영 글에 중독된 독자다.
내 편견의 소산이겠으나, 정운영 칼럼의 화사함은 그가 줄기차게 옹호했던 노동계급이나 만년 들어 열중한 ‘민족’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문체는 다분히 귀족적이었고, 줄잡아도 부르주아적이었으며, 서유럽의 문학 전통에 젖줄을 대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의 검술 교사가 되고 싶어했던 역사상의 여느 부르주아 지식인처럼, (계급적으론 결코 부르주아가 아니었던) 정운영도,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까지는 몰라도 몸에 간직한 부르주아적 상징재(象徵財)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외환 위기를 기점으로 세계화에 거세게 저항하며 ‘민족’을 구가한 그의 목소리는 흡사 일제시기 우국지사의 그것처럼 새됐지만, 기묘하게도 그 목소리는 프랑스 어디선가 흘러나온 반미주의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의 만년 글에 아로새겨진 냉소와 신경질은 그가 줄기차게 쏟아낸 열정의 대상이 어쩌면 허깨비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자아낸다.
그가 지지했던 프롤레타리아가 길거리나 작업장에서 마주치는 추레하고 이기적인 (다시 말해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 갈무리된 ‘위대한 노동계급’이었듯, 그가 만년에 부여잡은 민족도 그의 유럽 취향에 낯설어하는 (그러니까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동아시아 시골뜨기들이 아니라 그의 관념 속에서 빚어진 ‘세련된 한국민족’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일각에서 수군거렸듯 만년에 ‘전향’한 것도 아니고, 그 자신이 아이러니의 맥락에서 자조(自嘲)했듯 ‘변절’한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일관되게 추상을, 관념을 사랑하며 그 관념의 사랑으로써 자신을 위안했는지 모른다. 단지 그 관념의 이름이 ‘노동계급’에서 ‘(재벌을 포함한) 민족자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만년의 한 칼럼에서 그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를 타박했을 때, 직장생활의 불안정함으로 리무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이 선배 저널리스트의 얼굴을 나는 무람없이 그 말에 포갰다. 이것은 물론 비아냥거림이다. 그러나 거기엔 경의도 담겼다. 정운영은 어느 글에서 경제학자 폴 크루먼을 두고 (나쁜 뜻으로) 재승(才勝)이라 일컬었으나, 나는 정운영이야말로 (가장 좋은 뜻으로) 재승이라 말하고 싶다.
그 재주는 문재(文才)다. 정운영의 문장은 리무진이다. 초호화(여기엔 아무런 비아냥거림도 없다) 리무진이다. 정운영 칼럼은 한국 저널리즘 100년의 축복일 뿐만 아니라, 신문학(新文學) 100년의 축복이기도 하다.
▲ 시시한 에피소드 둘
정운영 VS 복거일 논쟁
하나. 정운영 선생이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으로 보낸 세월의 전반부를 나는 그 신문의 문화부 기자로 보냈다. 소설가이자 경제평론가인 복거일 선생이 1990년 <현실과 지향--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이라는 평론집을 내자, 정 선생은 서평 전문지 <출판저널> 에 매우 비판적인 서평을 썼다. 출판저널> 현실과>
세계관은 서로 대척이지만 이 두 사람은 동향 친구다. 대학 동문일 뿐만 아니라,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들었다. 한 중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으나, 둘 다 아산 온양 인근의 수재로 꼽히던 터여서 학력 경시대회 시상식 같은 데서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 한다.
나는 복 선생에게서 정 선생 글에 대한 반론을 받아 문화면에 실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 신문 지면에서 세칭 ‘자유주의 논쟁’이 시작됐다. 너덧 차례 반론과 재반론이 오가며 벌어진 그 논쟁은, 두 사람 글의 격조에 크게 힘입어, 개인-보편과 집단-특수가 맞부딪치고 스며드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정 선생이 세 번째 반론을 내게 건네며 “이걸로 끝이야. 말이 안 통해”라고 못박았을 때 나는, 논쟁을 더 끌고 싶은 욕심에서, “그러면 정 선배가 지는 건데요”라고 슬쩍 그를 자극했다.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당신이 뭘 알아?” 편집국 옆에 따로 방을 낸 조사부에서도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나는 파랗게 질려 꼬리를 내렸다.
함께한 중국 요리의 추억
둘. 정 선생이 1993년 <시지프의 언어> 라는 평론집을 냈을 때, 나는 문화면 머리에 실을 요량으로 12매짜리 기사를 써서 문화부장에게 넘겼다. 당시 신문사 안의 복잡한 사정으로 부장은 정 선생에게 적대적이었다. 시지프의>
“세 매만 써.” 힘이 쪽 빠졌다. “그럴 바에야 말죠.” ご?내 기사를 휴지통에 처박았다. 두 주일쯤 지나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 선생과 마주쳤다. “기사감이 안 되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부장과 협상했다. “여섯 매로 합시다.” “네 매!” “다섯 매요.” 그렇게 해서 기사는 다섯 매로 낙착됐다. 문화부 동료에게서 전말을 들은 정 선생은 얼마 뒤 내게 저녁을 샀다. 이름 모를 독주를 곁들인 근사한 중국 요리였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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