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 <최순덕 성령충만기> 로 단숨에 우리 문단의 우량주로 떠오른 소설가 이기호(34)씨가 2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펴냈다. 이름하여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ㆍ9,500원). 죽음 이후까지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자 한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가 생전에 직접 지어놓은 묘비명(“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에서 따온 제목이다. 갈팡질팡하다가> 최순덕>
랩, 성경, 경찰조서 등과의 이종교배를 통해 소설 형식의 지평을 넓혔던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도 유머와 아이러니로 무장한 천연덕스런 입담을 과시한다. 독자에게 2인칭 화법으로 최면을 걸기도 하고<나쁜 소설-누군가 누구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 , 일체의 서술 없이 할머니와 주고 받는 대화만으로 소설을 이어 나가는가 하면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 TV 요리프로그램 진행자의 말투로 요리강좌를 겸한 이야기 한마당을 펼치기도 한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 누구나> 할머니,> 나쁜>
작가의 장기인 엉뚱한 기담의 세계도 여전하다. 간첩을 피해 몇 달간 지하벙커에 숨어지내던 소년은 흙을 파먹으며 연명하다 흙을 주식으로 삼는 이상식욕자가 되고<…가정식 야채볶음흙>, 아르바이트로 국기게양대의 국기를 몰래 수거해 파는 청년은 밤마다 국기게양대와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누는 이상성욕자를 만나 밤이 새도록 국기게양대에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2> . 국기게양대>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형식 실험과 새롭고자 하는 과도한 의지가 추동한 형식 실험은 읽는 이에게 본능적으로 감지되고 구분된다. 기상천외한 인물들의 기이한 행동들은, 그 기괴함의 도량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내적 필연성으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건만, 꿈보다 해몽이 좋을 소지가 다분한 그의 이번 소설들은 기표와 기의의 유기적 결합에서 전편에 미달한다. 생뚱맞은 설정이나 억지스러운 전개가 군데군데 눈에 걸린다.
오히려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주인공이 작가와 고스란히 겹쳐지는 <원주통신>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수인(囚人)> 등의 작품에서 보듯, 작가의 ‘소설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이다. 특히 소설로 쓴 소설론이라 불러도 좋을 <수인(囚人)> 은 작품 집필을 위해 산 속에 들어갔다가 원자력발전소 폭발로 국가가 사라진지도 모르는 소설가를 통해 소설가가 된 자의 운명을 탐색한다. 대형서점 진열대에서 자신의 소설책을 찾아 오면 프랑스로 보내주겠다는 유엔심사관의 제안을 받고 소설가는 시멘트로 뒤덮인 교보문고 입구를 수십일간 곡괭이로 파낸다. 수인(囚人)> 수인(囚人)> 갈팡질팡하다가> 원주통신>
하지만 정작 심사를 통과하게 한 동력은 소설책이 아니라 곡괭이를 휘둘러대는 그의 육체적 노동력이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비만한 자본주의의 비계에 맞서 곡괭이를 휘둘러대야 하는 소설가의 가련한 운명. 그러나 어쩌랴. 수십일간 멈추지 않고 곡괭이를 휘두를 수 있는 그 건강하고 성실한 육체성으로 독자와 공명할 수 있는 보다 실한 이야기들을 캐내야 하는 것도 그의 운명인 것을.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