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황(膏肓)은 인체에서 심장 아래와 횡격막 위 부위를 뜻한다. 극히 예민하면서도 약효가 닿지 않는 곳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경공이 병이 들자 천하제일의 명의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병의 뿌리가 황의 위쪽과 고의 아래쪽에 있어서 뜸을 할 수도 없고, 침을 찔러도 닿지 않으며 약을 써도 미치지 못하니 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황은 불치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쟁을 고황에 비유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영조는 "당습(黨習)의 고질이 이미 고황에 들었다"고 개탄했다.
▦ 고황은 고상한 불치병이다. 샘(泉)과 돌(石), 즉 자연에 대한 애착이 불치의 경지에 이른 천석고황(泉石膏肓)이다. 이 병에 걸리면 혼탁한 세상에서는 살지 못한다.
<이러한들 어떠하며, 저러한들 어떠하리요 초야에 묻혀서 사는 어리석은 내가 이렇게 지낸다 해서 하물며 천석고황을 이제 와서 고쳐 무엇하리요.> (도산 12곡 중 일부) 퇴계 이황 선생은 집안의 강권으로 마지 못해 벼슬길에 나섰지만, 종국에는 조정의 만류를 뿌리치고 낙향, 초야에 묻혀 고고한 여생을 보냈다. 퇴계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도산 12곡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들>
▦ 원로 경제학자인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가 최근 "한국 경제의 병이 고황에 들었다"고 지적했다.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며 해학이 넘치는 글 솜씨로도 유명한 김 교수가 고황이라는 표현을 택한 이유는 한국경제의 병이 그만큼 중증이라는 진단이다. 그런데도 주치의는 전문성을 의심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아둔한 항해사가 위험한 암초지역을 지나는 형국이라는 말도 했다. 상식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초보운전처럼 어설프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위태로우니 전문가가 느끼는 위기감은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 내년 한국경제는 10년 만에 경상수지가 적자를 보여 재정적자와 함께 쌍둥이 적자시대를 맞을 것이라고 한국개발원(KDI)은 진단했다.
또 지난 10년간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1%를 밑돌았다며 경제의 기초 체력 저하현상을 걱정했다. 이렇게 내년 경제전망이 어두운 상황에서 북핵까지 겹치자 경기부양론이 점차 힘을 얻는 분위기다.
그러나 고황에 미친 중병이 일시적 대증요법으로 치료되지는 않는다. 진통제처럼 반짝효과에 불과하다. 힘들고 오래 걸리더라도 기본 체질을 바뀌고 병의 근원을 제거하는 원인요법을 써야 근치가 가능하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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