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예종) 기악과 3학년 김선욱(18)군. 순수 국내파 피아니스트인 그가 지난달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종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필수코스로 여겨지던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은 학생도 얼마든지 세계적 수준의 연주자로 길러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개교 13년을 맞는 예종의 이 놀라운 힘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예종은 1993년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교육기관으로,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등 6개 원으로 이뤄져 있다.
짧은 시간에 예종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크게 세가지 이유를 든다. 실기 위주의 과감한 학생 선발, 정상급 예술가로 구성된 교수진, 집중적인 전공 및 현장 위주의 교육 방식이 그것이다.
특히 예종의 음악ㆍ무용 분야 성과는 눈부시다. 김선욱, 손열음(피아노) 등 당장 세계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젊은 연주자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고, 무용수들의 유명 해외 단체 진출도 이어지고 있다.
예종 출신들이 대거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립발레단의 박인자 단장은 "예종에서 1년간 진행되는 실기 과정은 다른 대학의 4년에 해당한다"며 "예종 출신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고 말했다.
연극원과 영상원 졸업생들도 풍부한 실습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업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영상원 연출 전공자는 3ㆍ4학년 때 영화 한 편씩을 만들어야 하는데, 스태프로 참여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수십 편에 이른다.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는 "아직 기다려 봐야 알겠지만 4년간 실습 위주로 집중 교육을 받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예종 출신들에 대한 신뢰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 <왕의 남자> 의 원작, 드라마 <겨울연가> 는 모두 이 학교 졸업생들의 손에서 나왔다. 겨울연가> 왕의>
한국뮤지컬대상 수상작인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와 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등 연극원 학생들이 워크숍이나 졸업 발표회 때 만든 작품이 무대로 옮겨져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는 경우가 많아지자 예종 학생들의 발표회는 공연 관계자들이 반드시 눈여겨봐야 할 필수 코스가 됐다. 거울공주> 오!>
음악원과 무용원, 전통예술원은 고교 졸업 학력 없이도 입학이 가능한 '영재 선발제', 초ㆍ중ㆍ고교 학생들에게 주말에 전문 실기 지도를 해주는 '예비학교 제도'를 통한 인재 선점으로 큰 효과를 봤다. 김선욱은 이 같은 '예종 시스템'이 키워낸 대표 케이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해 중학교를 마치고 영재로 입학했다. 최근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서 우승한 박준호(21ㆍ기악과 4년) 역시 예비학교를 거쳐 영재로 입학했다. 그는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해외 유학을 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종은 현행법상 '각종 학교'로 분류돼 석ㆍ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다. 대학원 과정에 해당되는 전문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학위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기술학교'라는 오해도 받는다. 예종측은 개교 이후 대학원 설치를 추진해왔으나 타 대학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예종이 대학원 과정을 둘 수 있도록 하는 <한국예술학교 설치법> 제정을 의결했으나 "문화부의 지원을 받는 예종이 석ㆍ박사 과정까지 갖는 것은 특혜"라는 기존 예술대학들의 반발에 처리가 미뤄지고 있다. 한국예술학교>
"(예종은) 음악에 미쳐 살 수 있는 곳이다. 예술적 잠재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미래가 엄청나다."김선욱의 말은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예종 앞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기만 하다.
글 김지원기자 eddie@hk.co.kr사진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 황지우 총장이 말하는 예종 특징 "일단 저지르라고 하죠"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에서 만난 황지우(54) 총장은 "표현의 충동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 예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며 "학생들에게 늘 '일단 저질러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늘 청바지 차림인 황 총장은 연극원 교수와 원장을 거쳐 지난 3월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7개월째니 수습은 뗀 셈인데 여전히 어렵다"며 "목수가 좋은 나무를 보면 켜고 싶어하듯, 아이들을 보면 욕심이 난다"고 했다.
-예종의 눈부신 성과의 원동력을 꼽는다면.
"교육부의 간섭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선발 방식이 자유롭다. 또 실험적이고도 집중적인 교육과정 구성이 가능했다. 여기에 잠재력 있는 학생들의 조기 선발, 마에스트로급 교수들의 헌신 등이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개교 10여년 만에 황금알을 낳기 시작했다.
교육방식보다는 선발이 중요하다. 주위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게 높은 성취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음악원과 무용원의 경우 영재 입학제가 결정적이었다."
-현재 중점을 두고 있는 프로젝트는.
"한 장르 내에서 집중ㆍ심화 교육에 치중한 데 대해 문제 의식을 느꼈다. 현대예술에서 새로운 것은 경계에서 태어난다. 충돌 속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따라서 장르 간 융합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존 시스템은 유지하되 융합형 교육 트랙을 새로 만들려고 준비 중이다. 또 캠퍼스가 석관동과 서초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6개 장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환경, 즉 통합 캠퍼스 조성이 시급하다. "
-문제점도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안에서 복제가 일어나는 매너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교수들이 학생의 창의성을 살해해서는 안되는데, 예술가 교수들이 많다 보니 그런 일들이 자주 있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겠지만 학생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교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그런 점에서 김선욱은 참 재미있는 학생이다.
얼마 전 지도교수인 김대진 교수와 함께 만났는데 '베를린 필을 지휘할 때 교수님을 협연시켜 드리겠다'고 하더라. 건방진 듯 들리지만 그런 도전적 학생이 필요하고, 또 그런 학생에 대한 인내가 필요하다."
-한국예술학교 설치법 제정 문제를 해결할 복안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설립 취지와 맞지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학위 없는 각종 학교가 설립 목표는 아니었다. 줄리어드와 같은 제대로 된 예술학교를 만들기 위해 예종을 설립했다.
실기 중심이니까 학위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모든 예술 교육은 어차피 실기 중심이고, 학위를 주는 다른 곳도 이론만 가르치지는 않는다.
고된 교육 과정을 이수한 학생에게 정당한 교육결과를 인증해 줘야 한다. 국제 경쟁력을 위해서도 국제적으로 호환성 있는 학위가 꼭 필요하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음악원 입시현황 실기비중 80~90%… 수능은 전혀 반영 안해
지난 12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내에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는 예술사(학사) 과정 입시가 치러졌다. 성악과, 기악과, 지휘과, 음악학과에서 117명을 뽑는 입시에는 985명이 지원했는데, 기악과 바순 전공이 21대 1로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
지난 18일 바이올린 1차 시험이 치러지고 있는 예종 음악원 고사장 앞. 대기 중인 학생들의 표정에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5분 남짓한 연주에 합격 여부가 달렸기 때문이다.
예종 음악원 입시에는 수능 성적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1차 시험은 내신(10%), 음악기초이론(10%), 전공실기(80%)로 구성돼 있고, 2차 시험은 청음(10%)과 전공실기(90%)만 본다. 15명 정원 가운데 영재 입학제도를 통해 9명의 입학이 확정되기 때문에 일반전형을 통해 선발되는 인원은 단 6명에 불과하다.
고사실에는 박상민(첼로) 정명화(첼로) 오순화(비올라) 이성주(바이올린) 이호교(콘트라베이스) 교수가 학부모들과 함께 천 칸막이 뒤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다.
학부모의 입시 참관은 1993년 학교 설립 첫 해부터 시행하고 있다. 실기시험의 비중이 워낙 절대적이어서 혹시 있을 지 모를 부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했다.
김대진(피아노) 교수는 “그나마 지금은 칸막이가 설치됐지만 처음에는 아예 오픈돼 있어서 오해를 살까봐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넘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지정곡은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1번> 중 푸가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카프리스> 중 하나.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이올린 연주 소리와 곡을 바꾸라는 뜻의 종 소리 뿐. 참관하는 부모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수험생들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카프리스> 무반주>
시험을 마치고 나온 한 수험생(충북예고3)은 “국제콩쿠르에 입상해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고 싶다. 꼭 예종에 입학하고 싶다”며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응시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종 진학 여부를 결정할 때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학생들은 전했다. 피아노 전공의 한 지원자(서울예고3)는 “모두 다 유명한 전문 연주자가 되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서울대 등 명문대를 원하는 친구들이 더 많다”며 “학과 성적이 좋은 친구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수험생도 “예종 지원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음악원 최상호(성악) 부원장은 학생 선발 기준에 대해 “기술적인 면도 보지만 창의력과 발전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일정 수준이 되지 않으면 정원과 관계없이 뽑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글 김지원기자 eddie@hk.co.kr사진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 예종 출신 유명인… 김선욱·손열음 등 쟁쟁한 스타 만들어내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들은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입상하거나 기발한 문화 콘텐츠 생산으로 우리 문화예술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음악원에서는 김선욱 외에 이탈리아 비오티 콩쿠르 우승자 손열음(피아노), 베르디 콩쿠르 우승자 한명원(바리톤)과 바이올리니스트 민유경 신현수 등 쟁쟁한 젊은 음악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해외 유명 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서연(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안효진(독일 드레스덴 발레단) 한상이(모나코 왕립 발레단) 등은 물론, 국립발레단의 장운규와 이원철, 유니버설 발레단의 황혜민 등 국내 발레 스타들도 예종을 졸업했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최연소 출품으로 주목 받은 문성식은 미술원 출신 작가다.
영화 감독으로는 <고양이를 부탁해> 의 정재은 감독이 2001년 예종 출신으로는 처음 데뷔한 이후 <일단 뛰어> 의 조의석, <내 청춘에 고함> 의 김영남 등 연출 데뷔자가 12명에 이른다. 내> 일단> 고양이를>
<가을로> 의 촬영감독 이모개, 드라마 <겨울연가> 의 각본을 쓴 김은희와 윤은경, 영화 <괴물> 의 공동 시나리오를 쓴 하준원과 백철현도 영상원 출신. 애니메이션 감독 최현명은 지난 6월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괴물> 겨울연가> 가을로>
영화 <왕의 남자> 의 원작자 김태웅, 연극 <하륵 이야기> 의 배요섭,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의 장유정,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의 민준호 등은 공연계에 예종 파워를 몰고온 실력파 연출가들이다. 배우 오만석과 소설가 김애란도 예종이 낳은 스타. 거울공주> 오!> 하륵> 왕의>
이들 뒤에는 김남윤(바이올린) 정명화(첼로) 강충모 김대진(이상 피아노) 김영미(성악) 이영조(작곡) 정치용(지휘) 전미숙 남정호 김삼진(이상 무용) 등 정상급 예술가로 구성된 교수진이 있다.
이창동 김홍준 박광수 박종원 같은 유명 영화감독과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을 연출한 김윤철은 영상원 교수다. 설치미술작가 전수천과 건축가 민현식, 김덕수(사물놀이) 안숙선(판소리) 등도 현장 경험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내>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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