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기능이 의심스러운 환자에게 "여기는 어디? 지금은 어느 때? 당신은 누구?"라는 물음이 던져진다. '지남력(指南力ㆍOrientation) 장애'를 알아보려는 질문이다. "나는 개똥이, 지금은 10월17일 오후, 여기는 병원" 정도만 대답해도 지남력 장애는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 가지 물음에 본질적 대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공간적으로 우주 자체의 위치는 알 수 없고,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위치를 알 길이 없다.
● 지금 이 땅에서 '민족'은 허상
또 그런 시ㆍ공간적 위치를 파악해도 인간이 단순한 위치정보의 집합이 아닌 이상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 지적 탐구욕으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이를 두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남력 상실 상태에 있다"고 탄식했다.
세 가지 물음 가운데 핵심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사회ㆍ문화ㆍ역사에 투영하면 바로 정체성(아이덴티티) 문제가 된다. 우리의 정체성 의식에는 가족 사회 국가 민족 인류 등이 여러 겹의 혼방 옷감처럼 다층적 교직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민족'이다. 구한말 외세 침탈 과정에서 싹튼 우리의 '민족' 의식은 해방 이후 내용은 끊임없이 바뀌었지만 껍질은 그대로 남았다. 김구와 여운형, 박헌영과 김일성, 박정희와 김대중 등의 '민족'이 같을 수 없는데도, 절대적 숭앙의 대상처럼 무조건적 감정몰입을 불렀다.
돌이켜 보면 '민족'은 늘 우리 가슴을 뛰게 했다. 독재나 자본, 동맹 등 어떤 표적에도 들이댈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그러나 막상 민족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으면 설명이 쉽지 않다. 언어공동체, 역사공동체, 운명공동체 등을 떠올려 보지만 흐릿하다. 그만큼 애매모호하고, 허구적 의미 부여에 기댄 말일 뿐이다.
북한 핵 실험과 그 이후의 국내 논란을 보면 '같은 민족'이란 우리의 허상이 얼마나 뿌리깊은 지가 새삼스럽다. 우리의 민족의식은 순식간에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니, 60년 전에 갈라선 북한에야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북한은 결코 같은 민족이기 어렵다. 우리의 민족의식은 언어공동체에 기반하지 않는다.
이는 같은 말을 쓰는 중국 동포나 구 소련 지역 동포에 대한 동류의식의 쇠퇴만 봐도 확연하다. 그렇다고 역사공동체를 운위하기에는 60년의 분단과 전쟁이 남긴 역사의 골이 너무 깊다. 운명공동체란 말은 더욱 낯간지럽다. 분단 이래 남북의 운명이 같은 방향을 겨눈 적이 없었다. 더욱이 북한은 핵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시켰다.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억지로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여기다 보니 인식의 혼란만 커진다. '민족' 없이 어떻게 대북 인도적 지원이나 포용정책이 가능하냐는 물음은 어리석다.
세계 각국의 북한 지원에서 보듯,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웃 나라로서의 책임과 필요성은 더 크다. 흔히 '민족'을 대전제로 삼는 통일조차도 민족 대신 '이웃나라'라는 인식과 목표를 통해 더욱 빠르고,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좋은 이웃을 지향하는 것만으로 화해와 협력, 장기적 운명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
● 북한을 진정한 타자로 인식해야
'민족'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대안적 정체성의 부재 때문이다. 밖에서 유럽적 정체성, 전지구적 정체성이 거론되는 지금도 우리는 '한국민'이란 인식에도 이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이룬 역사에 자부심을 느낄 만한데도, 분단 극복이나 균형발전, 역사청산 등 높은 차원의 잣대에 집착하는 바람에, 비난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역사에서 발을 뺀 결과다.
이를 고치고, 스스로 일궈온 역사를 제 것으로 받아들여 '한국'이란 정체성을 인정하면 엄연한 타자로서의 북한의 참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니 북한 핵 실험을 둘러싼 논란에 앞서, 스스로의 '정체성 위기'나 '지남력 장애'를 의심해 보자. 자신이 어디의 누구인지도 자각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남을, 그것이 북한이든 미국이든, 제대로 간파하겠는가.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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