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TV 방송이 겪고 있는 급진적 변화를 짚어볼 수 있는 징후들 중에서 의미심장한 것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우선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장르 혼성화'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딱딱한 보도ㆍ교양 프로그램과 말랑말랑한 연예ㆍ오락 프로그램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표피적인 수준에서만 보더라도, 엄숙한 얼굴과 딱딱한 어조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들이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해 개그맨 못지않은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무척 강고했던 각 프로그램 장르별 관습은 조금씩 해체되고 있고, 예전의 관습적 표현에 기초한 철저한 장르 구별 짓기는 도전 받고 있다.
변주되고 재조합된 관습적 표현들로 채워진 에듀테인먼트나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은 '장르 혼성화' 내지 '탈 장르화'가 하나의 뚜렷한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다.
둘째, 목하 한국의 TV 방송에서는 프로그램의 '탈 영토화'가 진행중이다. 1990년대 초반 지상파 TV 방송이 'X-파일'을 방영하기 시작하면서 재점화 한 외화 시리즈의 인기는 지난 수년간 케이블TV 방송에서 지속돼 왔다.
식기는커녕 높아만 가는 인기를 자랑하는 외화 시리즈들은 이제 'CSI'와 '위기의 주부들'을 앞세워 다시 지상파 TV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을 잠식해 들어감으로써 10여년에 걸친 거대한 하나의 서클을 완성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젊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다양한 결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이종격투기 중계 역시 이제 충성도 높고 열광적인 팬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
한국 TV 방송의 탈 영토화는 문화지리적 측면뿐 아니라 매체적 측면에서도 드러나는데, 인터넷과 컴퓨터를 통해서만 유통되고 소비되던 게임이 이제는 버젓이 케이블TV 방송의 대표적 인기 채널로-단위 프로그램이 아닌 채널로!- 자리 잡은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셋째, 최근 한국의 TV 방송을 한 마디로 규정 지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수다 TV'가 아닐지. TV 화면을 뒤덮으며 그 유비쿼터스 함을 자랑하는 온갖 자막들이 절제를 모르고 천박하기만 한 한국의 시각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라면, 현재 한국 TV 방송의 참을 수 없는 수다스러움은 TV 방송이 기대고 있는 청각문화, 구술문화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색하고 말하는 토론 프로그램은 차치하고 몇몇 연예ㆍ오락 프로그램이나 토크 쇼만 보더라도, 이 시대 한국의 TV 방송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미디어라는 사실, 즉 옛 전통사회의 구술문화를 현대적 양식으로 계승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연예ㆍ오락 프로그램들, 그리고 나아가 몇몇 채널들-특히 홈쇼핑 채널들-을 보면, 과연 그 수다스러움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이승연 세이세이세이'나 '김혜수 플러스 유' 이후 한국의 TV 토크쇼가 '연예인들의 신변에 관한 잡담과 수다'라는 포맷으로 굳어진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SBS의 '야심만만'과 같은 토크쇼는 예전의 것들에 비해 한 발짝 더 진화한 형태의 토크쇼다.
그것은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과학적' 설문조사 결과라는 외피를 쓴 채, 패널로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사소한 개인사를 하나하나 천연덕스럽게 시청자에게 늘어놓는다. 1만 명에게 묻는다는 것은 결국 출연진의 수다를 정당화 시켜주는 일종의 알리바이인 셈이다.
홈쇼핑채널은 어떤가? 하루 24시간 내내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 온갖 종류의 기괴한 표현과 언설이 쉴 새 없이 생성되는 곳, 즉물적이고 순간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판촉 담론이 판치는 곳이 바로 홈쇼핑채널이다.
아무 말이나 주워 넘기는 것이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도 되는 듯 쉬지않고 떠드는 쇼 호스트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아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자막의 남용으로 인한 시각적 공해 못지않게 수다로 인한 청각적 공해가, 편안하게 TV 방송을 보고싶어 하는 시청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심각한 수준에 와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의 구술문화가 점잖아질 때 비로소 TV 방송의 수다스러움도 자연스레 치유가 될지 새삼 궁금해진다.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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