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씻는 길밖에 없구나. 고향선배이자 아름다운 동시를 쓰면서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몸 바쳐 온 임교순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는 과일을 씻는다.
●먹거리까지 걱정해야 하는 서민
어느 해 배추농사가 풍작을 이루면서 배추값이 그야말로 x값이 되어버렸을 때의 이야기라고 했다. 임 선생의 동네에서 배추를 길렀던 농민은 부아를 달래며 밭에 제초제를 뿌리는 것으로 배추농사를 엎어버렸다. 배추를 수확해서 출하해 봤자 운송비도 나오지 않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트럭과 함께 들이닥친 인부들이 그 배추를 수확해서 차에 싣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 약 뿌린 배추를 무엇에 쓰려고 하냐고 묻자 인부들이 하는 말이 “군부대에 납품을 한다고 하더라”는 게 아닌가.
세상이 이 지경이 되다니! 화가 치민 선생은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 우선 그 현장을 찍었다. 증거는 확보했다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업자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더란다. “제초제를 뿌린 배추인 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이걸 군에 납품을 한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군인이라면 그건 바로 우리 자식들이 아니냐. 고발할 테니 그리 알아라.” 그 후, 다시 밭에 나가 보니 트럭에 실었던 배추까지 내팽개치고 업자며 인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더라고 했다. 그런 개탄 끝에 선생은 말했다.
“자네 그 농수산물시장인가에서 배추 사먹지 말어. 그거 농약 덩어리야. 우리가 봐서 알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러나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거밖에 먹을 게 없는데, 이젠 김치며 상추쌈이며 모두 끊을 수밖에 없는가 싶었다. 담배값 오르면 담배마저 끊어야 하는 게 서민의 삶이 아닌가.
그런데 며칠 전, 지금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두부 제조용으로 쓰이는 콩이 전부 유전자조작식품(GMO)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전자조작식품’이라고 썼지만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를 두고도 우리는 유전자조작식품, 유전자변형식품, 유전자재조합식품이니 하고 자신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GMO란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서 해당 작물의 유전자가 아닌 다른 동식물이나 미생물 같은 외래 유전자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유전자를 변형시켜 만든 농산물을 말한다.
국내의 경우 이렇게 생산된 콩이며 옥수수가 이미 1996년 말부터 수입되고 있다. 게다가 종자시장의 70% 이상이 외국 회사에 넘어가 있는 실정이다 보니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씨앗이 국내에 유입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절대 안전한(zero risk)’ 식품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노랗게 지져서 양념간장을 쳐서 먹는 그 맛,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 속에서 떠 호호 불면서 먹던 그 두부에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야 할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핵실험에도 걱정할 일 없다는 정부
그러나 세계가 인정하는 미사일을 두고 그것이 발사될 때까지도 인공위성이라고 우기는 정부관리에게 나라를 맡기고 우리는 산다. 외국인이 오히려 놀랄 정도로, 지척에서 핵실험이 터져도 걱정할 게 없다는 정부 아래서 누리는 이 태평성대에 무슨 농약이니 유전자조작식품 따위를 가지고 왈왈(曰曰)대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했던 미국 네바다 주에서는 그 빛을 쏘인 얼룩소가 모두 하얗게 색이 바뀌기도 했었다. 최초의 핵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 교수는 평생 ‘내 손에 피가 흐른다’고 괴로워하며, 핵은 악마와 천사의 두 얼굴을 가졌다고 술회했었다. 그런데 채소는 씻어 먹으며 위안을 삼을 수나 있다지만 핵은 어찌할 것인가. 그건 흐르는 물에 아무리 담가두어도, 씻고 또 씻어도 그 가공할 파괴력과 살상력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 이제 어쩔 것인가.
한수산 작가ㆍ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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