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적선은 좋은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준 사람은 흐뭇하겠지만 거지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적선 때문에 구걸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걸인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마저 잃어버리기 십상이라고 강조한다. 공짜로 생긴 돈이 거지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고, 사탕발림처럼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는 주장이다.
이토록 야박한 자가 ‘빈자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듣고 있고, 세계적인 큰 상까지 싹쓸이 하고 있다. 마법 같은 그의 비법에는 양극화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우리가 되새겨볼 대목이 요모조모 많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방글라데시의 빈민구제 금융기관인 그라민은행과 이 은행의 설립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다.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치타공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유누스 총재는 1973년 홍수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경제학에 회의를 느꼈다. 무담보 소액신용대출(micro-credit)이란, 당시로서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신금융기법을 착상한 것도 이 즈음이다.
담보가 없는 사람에게 단지 재활의지와 능력만을 기준으로 대출을 해주는 것은 금융기관 입장에선 터무니 없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라민은행은 1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금융기관으로 성장해 세계 100여국에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무엇보다 유누스 박사의 혁신적인 가난 퇴치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그는 빈곤의 사슬을 끊는 도구로 적선 대신 대출을 활용했다. 물고기를 그냥 주는 시혜적 복지보다 그물 사용법을 깨우치는 생산적 복지를 구현한 것이다.
소액신용대출은 대나무 의자를 만드는 한 방글라데시 여성을 도우려는 소박한 궁리에서 탄생했다. 그는 이 여성이 아름다운 의자를 만들고도 매일 20센트 정도밖에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재료인 대나무를 살 돈이 없어 의자를 사고자 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야 했고, 이 바람에 이 여성은 미리 정한 가격 대로 팔아야 했다. 유누스 박사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초기 자금이 필요한 42명의 명단을 받들어 27달러를 꿔줬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유리한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었다. 또 떼먹을 것이란 우려와 달리 빌린 돈을 대부분 갚았다. 대표적인 이윤추구수단인 대출이 시장의 폭력으로부터 빈자를 지키고, 자활을 견인하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서민금융이 위태롭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도 주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금융기관의 공공기능이 위축된데다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등 서민금융기관도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은행-보험ㆍ카드-서민금융기관-대부업체-불법 사채시장으로 구성된 대출시장의 허리가 붕괴된 셈이다.
이 바람에 은행 카드 등 양질의 대출창구를 이용할 수 없는 서민들은 연 최고 대출금리가 66%인 대부업체와 수백%에 달하는 불법의 사채시장으로 내몰려 끝내 빈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걸음마 단계이지만 국내에도 신나는 조합과 사회연대은행 등이 소액신용대출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11월에는 신용회복위원회 주도로 3번째 은행이 탄생할 전망이다. 빈민은행의 불씨를 살려가야 할 때다.
김경철 경제부장 k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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