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체한다. 건방지다. 그래서 죽여버리고 싶다.”
그룹 동방신기의 리더 유노윤호(20)에게 ‘본드 음료수 테러’를 가한 고모(20ㆍ여)씨의 말(편지)이다. 그는 동방신기의 ‘안티(Anti) 팬’이라는 그늘에 숨어 범행을 저질렀다. 특별한 원한이나 내세울 명분도 없다. 경찰 조사내용만 살펴보면 “그냥 싫어서”라는 감정이 폭발했을 뿐이다. 경찰은 16일 초범이고 자수한 점을 들어 고씨를 불구속 입건키로 했다.
사건은 일단락된 게 아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 잠복해있는 ‘묻지마 안티문화’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른바 안티회원이 말, 글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극단적인 위해를 가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안티의 덕목은 특정 가치나 사상, 단체, 인물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대안제시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안티문화는 비뚤어지고 맹목적인 비난만 난무한다.
●집단화 과격화하는 ‘묻지마 안티’
안티는 연예인만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의 설기현(27ㆍ레딩FC)은 5월 세네갈과의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역주행 사건’을 일으킨 직후 우후죽순 생겨난 안티 팬으로부터 사이버 테러를 당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안티사이트가 생겨났고, 인터넷엔 합리적인 근거 없이 그를 욕하는 댓글이 봇물을 이뤘다. 말만 안티지 실은 정신적인 비난 수준을 넘어 집단린치에 가까웠다.
최근에는 안티 대상이 광범위해지고 집단화, 과격화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른바 ‘떴다’ 하는 일반인도 안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해 벌어진 ‘개똥녀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당사자는 사이버에 떠도는 인신공격성 악플로 한 달 이상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이후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네티즌들은 ‘일단 욕부터 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안티 글 올리기에 혈안이 될 정도다. 사실확인은 제쳐두고 오로지 안티 대상을 죽이는 일에만 골몰하는 실정이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욕설은 기본이고 신원을 공개하는 등 방법도 갈수록 과격해지고 치밀해지고 있다.
●묻지마 안티의 온상은 사이버 공간
모 포털사이트 창에서 ‘안티’로 검색해보니 안티카페는 1만5,000개가 넘었다. 특정 연예인이나 인물에 대한 안티카페가 대부분이다. 문제가 된 동방신기의 안티카페는 다음에만 100개가 넘었고, 2004년 1월 개설된 ‘동방신기 공식 안티카페’는 회원수가 21만3,000여명에 달했다. 사이버가 묻지마 안티의 온상이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문화가 보편화하면서 충동적이고 무차별적인 안티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인터넷상에서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미성숙한 문화가 싹트고 있다”고 말했다.
사이버 공간에서 활개치고 있는 묻지마 안티는 감시나 자체 정화도 쉽지 않다. 이상훈 NHN 서비스파트장은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하고 있지만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안티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24시간 상시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만 묻지마 안티카페일수록 이름을 따로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안티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전쟁과 사랑, 웰빙, 사형, 국가보안법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안티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종섭 다음 커뮤니티본부 마케팅팀장은 “안티라는 것 자체가 관리 대상은 아니다”며 “사회전복, 국민정서에 반하는 내용, 누가 봐도 미풍양속에 어긋나거나 범죄를 도모하는 경우에 규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김이삭기자 hiro@hk.co.kr
■ 전문가들이 말하는 해결책
전문가들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의 좌절감과 나와 다른 것을 배격하는 사회 분위기가 맞물려 ‘묻지마 안티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가상공간은 비정상적인 안티문화를 증폭시켰다.
한양대 박기수(문화컨텐츠학과) 교수는 “과도한 안티는 증오와 애정의 양면”이라고 해석했다. 박 교수는 “일부 극성 팬은 자신과 스타 간에 수직적 관계를 설정하고 과도하게 충성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한다”면서 “이런 집착이 조금 어긋나면 무조건적인 적개심으로 돌변한다”고 분석했다.
지나친 안티행동은 삐뚤어진 자아만족의 수단이기도 하다. 연세대 황상민(심리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안티는 자신의 문제를 밖에서 해결하려는 일종의 응석받이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공격할 뿐 공격하는 대상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나(우리)와 같으면 ‘선’, 다르면 ‘악’으로 구분하는 사회적 잣대도 원인으로 지적됐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과) 교수는 “나와 남을 구분 지으려는 양극화 심리나 집단 편견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면 과잉 안티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안티행동에 대한 제한이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문제다. 한양대 김석현(정신과) 교수는 “과거에는 불만이 있어도 주위 사람 몇몇에게 해코지를 하는 정도였다”며 “악성 댓글에서 보듯 재미 삼아 올린 글이 꼬리를 물고 확산되기 때문에 피해가 증가하기 때문에 공격자의 만족감도 그만큼 크다”고 분석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