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민주ㆍ인권운동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14일 타계한 홍남순 변호사는 고결한 품성을 가지고 평생을 양심수 무료변론 등 인권활동과 민주화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의인(義人)’이자 5ㆍ18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광주에 홍남순 변호사가 있다는 것은 광주에 무등산이 있다는 것 만큼이나 알려져 있다”는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정남씨의 평가처럼 그는 ‘광주의 어른’이었다.
고인은 스무살 때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상공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1948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광주지ㆍ고법, 대전지법 판사를 거쳤으며 63년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61년 5ㆍ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광주지법을 방문했을 때 그는 다른 판사들과 달리 현관에 도열해 영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인사상 불이익과 함께 수난을 당하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이후 그는 박정희 유신정권과의 외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64년)과 3선 개헌 반대 투쟁(69년), 민주수호 국민협의회(71년) 활동 등을 통해 군부독재에 항거했다. 70년대 들어서는 전남대 학생들이 유신정권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뿌린 ‘함성지 사건(73년)’과 3ㆍ1민주구국선언(76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78년) 등 무려 30여건의 긴급조치 9호 위반 시국사건 무료 변론을 맡았다. 그는 ‘긴급조치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떨쳤으나 함성지 사건의 무죄판결 이후 아쉽게도 단 한 건도 무죄판결을 받아내지 못했다.
기개도 대단했다. 80년 5ㆍ18 당시 68세의 나이에 모진 고문과 협박을 당하면서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나를 엮어 넣으려면 처음부터 각본을 다시 짜라”며 수사관을 호통 쳤던 일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1년7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83년 복권된 뒤에도 5ㆍ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광주 문제’ 해결에 헌신했다. 특히 신군부의 탄압 속에서도 5ㆍ18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민주화운동조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면서도 꿋꿋한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다. 가족과 주위에서 ‘5ㆍ18보상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소신껏 참여한 일에 무슨 보상이냐. 5월 영령들에게 부끄럽다”며 보상금 수령을 거부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이후 95년 5ㆍ18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광주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주위에서는 그에게 통일운동이나 환경운동에 나서 줄 것을 바랐지만 그는 “민주화운동이 직업이 돼서는 안 된다”며 단호히 거절하기도 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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