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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그랜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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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그랜드 디자이너

입력
2006.10.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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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 쓰나미에 가려 눈길을 끌진 못했지만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임명 100일을 앞두고 최근 국회에 자신의 경제철학과 소신을 밝히는 문건을 제출했다.

열린우리당 정덕구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서 형식이었다. 여기서 그는 “경제규모가 확대ㆍ복잡ㆍ다기화하면서 정부 역할은 직접 개입보다 시장의 정상 작동을 지원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립하는 것에 맞춰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정부는 경제ㆍ사회 등 각 부문이 균형발전을 위해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그랜드 디자이너(Grand Designer)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 얘기를 대하고 보니 얼마 전 읽은 한 칼럼에 인용된 구절이 생각났다. 코카콜라병 등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 20세기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레이먼드 로위(1893~1986)의 ‘MAYA론’이다.‘Most Advanced,Yet Acceptable’의 두음표현인 이 용어는 “앞서 가되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혁신적이고 이상적인 아이디어라고 해도 소비자나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헛일에 불과하다는 디자인 세계의 철칙을 보여주는 경구다. 정부가 기왕에 디자이너를 자처했으니 이 잣대로 정책을 평가해보면 어떨까.

▲ 사실 노무현 정부 만큼 현란하고 거창한 수사를 유행시킨 정권은 찾기 힘든다. 혁신, 코드, 선진화, 로드맵, 코드, 마일리지, 스웨덴 모델, 네덜란드 모델, 해밀턴 프로젝트, 비전2030, 희망한국, 생산적 복지, 동반성장, 균형발전 등등. 노 대통령 특유의‘독서정치’와 ‘지적 유희’를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디자이너적 관점에서 보면 그가 창의적이고 시대를 선도하는 감각과 자질을 갖췄다고 추겨 세울 법도 하다. 그러니 줄곧 정권코드를 맞춰온 권 부총리가 ‘그랜드 디자이너’라는 통큰 헌사(獻辭) 를 쓴 것은 이런 배경이리라.

▲ 하지만 다시 로위의 말로 돌아가면, 권 부총리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디자인의 두번째 본령, 즉 정책 소비자의 마음을 잡는 노력을 놓치고 있어서다. 그는 “개인적 힘이나 카리스마, 예산권 등으로 뒷받침되는 경제부총리의 역할은 이젠 유효하지 않다”면서도 새로운 역할모델을 제시하지 못했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혼동한 결과다. 엊그제 정덕구 의원은 현 정부를 ‘씨름판에서 샅바를 놓치고 허둥지둥하는 씨름꾼’에 비유했다. 그랜드 디자이너는 제쳐두고 경제ㆍ외교ㆍ안보의 망가진 자세부터 고쳐 잡으면 좋겠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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