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最古)의 고서점 ‘통문관(通文館)’의 창업자인 산기(山氣) 이겸노(李謙魯)옹이 15일 오후 2시45분 서울 종로구 누상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평남 용강 출신인 고인은 일본 유학의 꿈이 좌절된 뒤 서울에서 고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고서적과 인연을 맺었다. 1934년 고서점 금항당을 설립했으며, 광복 후 통문관으로 상호를 바꿨다. 현재 손자인 종운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통문관은 한국학 자료의 보고이자 한국학 연구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국어학자 이희승, 미술사학자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등 국학 연구의 대가들이 수시로 통문관을 드나들며 필요한 자료를 구했고, 고인과 교우했다.
당시 맺은 인연이 50여년 뒤 화제를 낳기도 했다. 고인은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당시 딸을 만나기 위해 남한에 온 월북 국어학자 류렬 박사를 찾아 55년 전 통문관에서 출간한 류 박사의 책 ‘농가월령가’와 50만원을 건넸다. 돈은 미처 전하지 못한 원고료였다.
‘적서승금’(積書勝金ㆍ책을 쌓는 것이 금보다 낫다). 통문관에 걸린 편액의 글귀는 평생 책과 함께 한 고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고인은 한국전쟁 때 가재도구 대신 고서를 짊어지고 피란길에 올랐고, 심하게 훼손된 고서를 한 장 한 장 인두로 다리고 풀을 먹여 살려내기도 했다.
그 덕에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독립신문’ 등 숱한 국보ㆍ보물급 문화재들이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고인은 한국 서지학의 산파였다”고 평하면서 노년에도 낡은 책을 다리미로 펴며 “내가 돌봐준 옛 책이 이제는 나의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유족은 동악(東岳ㆍ70ㆍ㈜제우스 회장), 동향(東鄕ㆍ고려대 명예교수), 동연(東淵ㆍ고향각 대표)씨 등 3남2녀와 사위 이영석(李永錫ㆍ65ㆍ영창서점 대표)씨가 있다. 장례는 용인의 선산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진다. 빈소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2)3410-6914
이희정 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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