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막이 올랐다. 개막작은 지난 9일 공연을 마친 ‘정화된 자들’ (원제 Cleansed). 영국 출신의 여성 작가 사라 케인이 쓰고 폴란드의 크쉬스토프 바를리코프스키가 연출한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택한 데는 현대연극의 두 가지 특징적 측면을 의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는 연극이 다른 장르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만한 속성, 즉 실황 예술(live-art)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몸의 현존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흐름이요, 다른 하나는 말의 효용성과 소통 가능성을 의심하던 20세기 연극과는 달리 언어의 끝 간 데를 좇는 흐름이다.
‘정화된 자들’은 폭력에 반응하는 육체의 직접성 및 프롤로그의 긴 독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현대 연극의 두 흐름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새로운 움직임의 도래가 그러하듯, 인류의 윤리적 변형의 기미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정화된 자들’은 인간의 정체성 가운데 기존의 성 윤리에 대해 강력히 반문한다. 기존 성 정치학이 각자 소속돼 있는 성(sex)에 고착된 기능 지정(gender)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단계까지 와 있다면, 이 작품은 문자 그대로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라는 물질적 조건이 지정하는 성애와 정체성의 ‘정체’를 교란하고자 한다. 그 자신 성폭력, 동성애, 정신질환 속에서 성 정체성 선택에 집요한 사회적 검열과 응징을 겪다가 28세의 나이로 자살해야만 했던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무대는 수용소의 샤워장처럼 역사성을 띄기도, 현대적인 샤워 시설 같은 일상성을 띄기도 하며, 고문실이나 생체실험실 등 잔혹한 상징 공간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곳에서 인류는 욕망에 따라 동성애자(칼과 로드), 근친애자(그레이스와 그레이엄), 성 정체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기에 파괴되는 자(로빈), 정상적 성애 관념에 강박되어 다른 이들을 응징하는 이성애자(팅커) 등으로 분류되고 이들은 폭력과 잔혹함을 통해 역설적인 의미에서 ‘정화’된다.
사지 절단, 자살, 가격, 근친 상간, 성기 교체, 푸코적인 감시사회 정신병동에서 행해지는 폭력 행위 등이 난무하는 무대 표현은 센세이셔널리즘을 겨냥하는가 싶어 다소 불편하지만 자기 경험의 극한을 오롯이 전달하려는 작가의 진정성과 그의 때 이른 죽음이 만든 부차적 명성에 설득되고 만다. 과연 연극은 케인이 보여주려던, 인간 고통의 번역 기계가 될 수 있는가? 지구라는 별 위, 기성의 윤리가 저물어가는 이 가을 저녁, 우리 삶의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공연들을 만나러 외출을 준비할 때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10월 29일까지 열린다.)
극작ㆍ평론가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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