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 영국의 허버트 조지 웰스(1866~1946)는 SF소설 '자유로워진 세계(The World Set Free)'를 썼다. '1956년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는데 엄청난 위력의 핵폭탄이 등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을 중심으로 핵물리학이 한창 연구되던 시기였다.
히틀러가 난리를 부리던 1939년 여름, 헝가리 출신 독일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1898~1964)는 나치를 피해 함께 뉴욕에 와 있던 아인슈타인을 찾았다. 머리 속에 박혀 있던 웰스의 소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이론을 활용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주창했던 질라드는 히틀러가 이를 실현에 옮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만들어야 독일의 개발을 막을 수 있다며 아인슈타인을 끈질기게 설득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핵폭탄으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8월 2일 발송됐으나 10월 11일 전달됐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9월 1일)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한 뒤에야 대통령의 책상에 올려졌다. 루스벨트는 아인슈타인으로부터 편지를 두 번 더 받고 핵폭탄 제조를 위한 '맨하탄 계획'을 재가했다.
■ 루스벨트는 야심만만한 37세의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를 맨하탄 계획의 책임자로 발탁했고, 그는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핵폭탄 개발에 반대하던 원로 과학자 일부를 설득하고, 나치를 피해 미국에 온 유럽 과학자들을 모아 팀을 꾸렸다.
아인슈타인은 빠졌고 질라드는 핵심 멤버가 됐다. 히틀러에 겁먹은 영국의 처칠 총리가 적극적 후원자가 됐다. 1945년 7월 두 종류의 폭탄이 완성됐다. 막대 모양의 'little boy(꼬맹이)'와 공 모양의 'fat man(뚱뚱이)'은 루스벨트와 처칠의 별명이기도 했다.
■ 루스벨트의 급서(1945년 4월 12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강경파 트루먼은 일본을 희생양으로 삼아, 재선에 성공했다. 원자로 실험(1942년 12월)으로 핵폭탄 제조를 끝낸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1901~1954)가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 말을 트루먼은 즐겨 인용했다.
아인슈타인과 질라드가 '모의'했던 시기는 세계대전의 위협이 닥쳤을 때였고, 동기는 히틀러의 야욕을 꺾자는 것이었다.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가 정치적으로 변질되고 있음이 두렵다. "정치는 순간이지만 방정식(이론)은 영원하다."-아인슈타인의 묘비명이다.
정병진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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