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장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미치도록 잡고 싶은 범인을 밝혀내고 싶다.”
경찰 과학수사요원의 존재이유다. 하지만 이제 범인은 더 이상 현장에 증거를 흘리지 않는다. 시시껄렁한 잡범도 마찬가지다. 지문 머리카락 등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다. 범죄현장에 선 과학수사요원은 막막하다. 퍼뜩 프랑스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 박사의 오랜 가르침이 떠오른다. “접촉한 물체는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반드시.”
다시 힘을 낸다. 피해자 옷에 묻은 보풀(섬유질)과 눈곱만한 핏방울(혈흔), 바닥에 떨어진 흙 한 톨(미세먼지)을 수거한다. 유독 약품과 매캐한 매연, 희미한 조명을 견디며 얻어낸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증거’다. 보물이나 다름없는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넘어간다. 과학수사요원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치밀하고 정교한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수사는 하염없이 답보상태에 빠진다.
감정과 달리 감식은 신속성과 효율성이 생명이다. 경찰청은 감식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서울경찰청에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을 만든다고 10일 밝혔다. 한마디로 ‘한국판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실험실’을 갖추는 셈이다. 프로젝트 이름도 ‘CSI 통합지원 시스템(The Total Assistant System Of CSI)’이다.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은 검시(檢屍)와 화재감식, 범죄분석(Frofiling)을 통해 확보한 증거물의 기초분석과 감정분류 및 기법연구, 범죄정보 통합관리를 위한 실험실이다. 실체용 현미경, 조명확대경, 중독사(中毒死) 판별분석기, 일산화탄소 측정기, 원심분리기 등 기본장비를 확보했고 성분분석기, 고배율 현미경, 저온 저장장치 등도 설치할 예정이다. 검시관과 프로파일러(범죄분석요원), 현장감식요원 등 10여명이 배치된다.
이는 경찰 과학수사요원들의 오랜 꿈이다. 지문과 족적 등은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 등을 이용해 경찰이 직접 감식해 왔으나 혈흔이나 미세먼지, 섬유질 등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증거물의 감식은 국과수에 의존해야 했다.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을 기획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 경정은 “증거물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공판중심주의 도입과 범죄의 지능화, 이상동기 및 연쇄범죄 증가에 발맞춰 수사의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밝혔다.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은 실제 수사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만약 범죄현장에서 용의자의 혈흔이 발견됐다면 국과수의 감정은 DNA 분석을 통해 정확한 한 사람을 밝혀 주지만 현장증거 분석실은 일단 혈액형이라도 검사하는 방식으로 용의자의 폭을 4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윤 경정은 “용의선상에 오른 100명을 25명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은 국과수의 과중한 업무를 보완하는 한편, 수사 효율성을 높이고 인권침해의 소지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팀에 속한 프로파일러는 기존의 물질 증거 중심에서 ‘행동 증거’를 확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어디에서 증거를 찾는가(Know-Where)’에서 어떻게 증거를 찾느냐가 관건인 ‘노하우(Know-How)’로 수사지원의 목표를 전환하겠다는 뜻이다. 제1호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은 다음날 4일 ‘과학수사의 날’에 맞춰 문을 연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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