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찬 바람에 강한 ‘바람의 아들’ 이종범(36ㆍKIA)의 발은 살아 있었다.
1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발은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0-0으로 맞선 KIA의 4회말 공격. 선두타자 2번 이종범은 좌전안타로 포문을 연 뒤 한화 선발 류현진의 큰 투구폼을 훔쳐 2루에 안착했다.
이종범의 진가는 잠시 후 더 빛났다. 이종범은 1사 1ㆍ2루에서 5번 이재주 타석 때 기습적인 3루 도루를 감행했다. 예상치 못한 한화 포수 신경현이 급히 3루로 공을 던졌지만 이종범의 발은 베이스를 통과한 뒤였다. KIA 벤치에서는 환호성이, 한화 덕아웃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이어진 조경환의 우익수 희생플라이. 이종범의 발 하나로 만든 점수였다.
이종범은 신인이던 지난 93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도루 7개를 성공시키며 1승1무2패로 뒤지던 시리즈를 뒤집고 MVP에 올랐다. 7개의 도루 가운데 내리 3연승을 한 5, 6, 7차전에서만 6개를 쓸어담으며 ‘발’ 하나로 소속팀 해태를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 놓은 바로 그 모습이었다.
KIA가 이종범의 신들린 듯한 주루 플레이에 힘입어 9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 6-1로 이기고 1승1패로 균형을 맞췄다.
이종범은 1-1로 맞선 6회에도 1사 후 짧은 좌중간 안타를 친 뒤 빠른 발로 2루타를 만들며 분위기를 다시 끌어 왔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던 경기가 다시 KIA 쪽으로 급반전되는 순간. KIA는 고의4구와 볼넷으로 만든 2사 만루에서 이현곤이 한화의 ‘괴물 신인’ 류현진의 4구째를 받아쳐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극적인 만루홈런을 쏘아올렸다.
류현진은 프로 데뷔 첫 만루홈런 허용이었고, 이현곤은 생애 첫 만루홈런. 두팀의 운명처럼 명암이 교차했다. 역대 준플레이오프 4번째 나온 그랜드슬램이었다.
KIA는 이날 승리로 지난 2002년 LG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부터 이어 온 포스트시즌 8연패의 악몽에서 벗어났고, 지난 94년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한 이후 준플레이오프 6경기 만에 첫 승을 거뒀다. 1차전에서 뼈아픈 보크로 패전투수가 됐던 KIA 한기주는 1-0으로 앞선 6회 1사 2루에서 마운드에 올라 2와3분의1이닝을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하루만에 역대 준플레오프 최연소 승리투수(19세5개월10일)로 우뚝 섰다.
이현곤은 2차전 MVP로 선정돼 상금100만원을 받았다. 두 팀은 하루를 쉰 뒤 대전으로 장소를 옮겨 11일 오후 6시 최종 3차전을 치른다.
광주=성환희 기자 hhsung@hk.co.kr
■ 준PO 2차전 양팀 감독의 말
이종범 발이 류현진 홀렸다
▲KIA 서정환 감독(승장)=지면 끝이라는 각오로 달려들었다. 한화 선발 류현진을 상대로 발빠른 선수가 진루하면 번트보다는 도루를 시도할 계획이었다. 다행히 이종범이 도루를 통해 류현진을 흔들었고, 팔꿈치 부상에 시달렸던 그레이싱어가 생각보다 잘 던져줬다.
그레이싱어 공략 못한게 패인
▲한화 김인식 감독(패장)=경기를 하다 보면 홈런을 맞을 때도 있다. 패인은 KIA 선발 그레이싱어를 공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류현진이 이현곤에게 만루홈런을 맞기 전에 (김원섭에게)볼넷을 내준 게 화근이었다. 류현진이 투구수 75개까지는 참 잘 던졌는데…. 본인에게는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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