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미래에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고, 그 복제인간 1번이 혹은 2번이나 3번이 진짜와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를 진짜라고 믿는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가짜라고 믿는 상대를 죽임으로써? 혹은 뇌 이식이 가능해지는 어느 날이 도래했다고 예상해 보자. 뇌만 작동하는 식물인간의 뇌를 꺼내 의식이 정지된 누군가의 몸에 이식한다면, 그 때 그 몸의 주인은 누굴지 궁금하다. 의식을 관장하는 뇌인가, 뇌를 품은 몸인가.
● 삶을 지배하는 과학기술의 힘
살아생전에 이런 혼란을 겪고 싶지는 않지만, 예술적 상상력은 우리의 미래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고민하게 해준다. 앞에서 예로 든 두 가지 상상력은 모두 내가 최근에 본 연극, 영국 극작가 카릴 처칠의 '넘버'와 일본 연극인 히라타 오리자의 '과학하는 마음'이 던져준 질문이다.
덕분에 과학에 문외한인 나 역시 눈부시다 못해 아찔하게 느껴지는 과학의 속도를 곁눈질하면서, 하루살이처럼 인생에 허덕이느라 제대로 조망하지 못했던 우리 삶의 지반을 문득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내 발밑에서 나도 모르게, 나와 무관한 듯 요동치는, 그러나 내 삶을 지배하는 저 변화무쌍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힘.
너무 먼 이야기인가. 그럼 좀더 쉽고 가까운 예로 지하철 안의 모습만 살피자. 팔십년대의 신문을 읽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풍경이 어느 날부터 호주머니에 든 삐삐와 핸드폰을 꺼내드는 풍경으로 바뀌더니, 분주하게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이젠 미니 TV를 시청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무언가를 절실히 기다리거나 오롯이 혼자임을 견디는 고독한 자기 유폐는 우리 사회에서 점점 희귀해지거나 견디기 힘든 정서로 자리 잡아가는 듯하다.
최근 십여 년간 급증하는 자살 수치 역시 정치나 경제의 혼란이 준 절망감만이 아니라 무위와 고독에 전혀 내성이 생기지 않도록 매순간 즐겁게 테크놀로지에 탐닉했던 삶의 방식과도 조금은 연관되는 것 아닐까.
●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해보자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용하는 삶의 도구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자체를 바꾸어놓는다. 과학과 기술 산업은 이제 우리들의 삶을 그저 편안하게 만드는 도구적 유용성의 수준을 넘어서, 인간의 삶의 방식과 고유한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재편성할 것을 요구하는 지점까지 가 있다.
경제적 가치와 상관없는 인문학적 성찰력과 예술적 상상력이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우리가 계량적 가치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구호는 문화산업이니, 이 난센스를 어찌하랴!
풍문에 듣자니 과학기술부와 과학문화재단이 '과학기술, 인간을 만난다' 라는 포럼으로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연이어 예술과의 만남도 준비하는 눈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시도다.
김명화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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