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가까이 있다. 가족이다.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헤매기 일쑤다. 세상을 따라잡다 벼랑 끝에 몰려서야 비로소 가족이 보인다. 늦었다고 후회하지만, 결코 아니다. 가족은 늘 우리 품에 넉넉히 있다. 그저 손을 내밀면 된다.
한가위(6일)를 맞아 너도나도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3회에 걸쳐 따뜻한 가족의 행복을 찾아가는, 그리고 찾은, 또 키워가는 우리 이웃을 만난다./편집자주
“베고 쳐낸 건 나무가 아니라 해진 가슴에 똬리를 튼 몹쓸 상처와 좌절이지요.”
거창하지만 사실 그랬다. 강원도 오지의 해발 780m 산등성이엔 그들이 있다. 적막한 골짜기엔 기계톱 굉음이 쉴 새 없다. “넘어간다!” 신명 난 외침에 10m짜리 거목도 ‘쩌억~’ 비명과 함께 맥없이 쓰러진다.
지난달 29일 강원 정선군 임계면ㆍ리 국유림에선 ‘정선 자활영림단’의 솎아베기(간벌) 작업이 한창이었다. 잔가지 베고 덩굴 쳐내는 작업(영림ㆍ營林)이야 별다를 것도 없다. ‘자활’을 앞세운 건 이들이 4~6년 전엔 노숙자였기 때문이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들이 왜 굳이 산으로 갔을까. 단원 하나가 땀을 훔치더니 “숲이 아니라 나를 가꾸고 희망을 가꾸고 있다니까”라며 허허 웃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산골행 버스에 몸을 실었던 몇 년 전만해도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노숙자 신세, 더 망가져도 그만이었다. 세상을 잊고 상처를 떨구고 차츰 마음을 잡아갔다. 불현듯 그리운 건 피붙이였다. “그래, 가자! 가족 품으로”
조휘정(45)씨는 외환위기 때문에 잘 나가던 직장(대형 건설사 작업반장)을 잃었다. 서울역과 쪽방을 전전했다. 2000년 숲가꾸기 사업에 이어 자활영림단에 몸을 담고 새 출발했지만 부모 뵙기가 민망했다. 장남(2남2녀) 역할도 못하는 처지가 스스로 딱해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조금만 더’라고 다짐했다.
조씨는 지난해 7월 5년 동안 못 뵌 아버지를 영정(影幀)으로 만났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진 게 없으면 어떤가. 식구들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고 성실하게 사는 게 효도요, 행복인데….”
그는 요즘 6년만의 한가위 귀성을 준비하느라 입이 귀에 걸렸다. 어머니 뵐 생각에 잠을 설친다. 그는 “고향 작은 아버지 댁에서 차례도 지내겠다”고 말했다. 그의 눈엔 이미 고향 강화도의 바다물결이 넘실댔다.
김형식(38)씨도 행복의 단추를 채우고 있다. 그는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서 1억원의 빚을 떠안고 노숙을 하다가 2001년 영림단원이 됐다. 3년 전 부모님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기어이 못난 자식을 찾아왔다. “울기만 하는 어머니에게 ‘보고싶었다’는 말도 못했어요. 철없이 살아온 세월이 원망스러워서….” 그렇게 첫번째 단추가 채워졌다. 이제 그는 빚도 거의 갚고 내년엔 결혼도 한다.
어디 둘뿐이랴. 방 한 구석에 오미자 다래 등 산에서 딴 열매로 틈틈이 담근 과실주를 부모님께 안겨드릴 꿈에 부푼 박기환(51ㆍ속초)씨도, “가족과 어울리는 일상의 행복은 삶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버팀목”이라는 배창근(43ㆍ부산)씨도 마음은 이미 고향 길에 접어들었다.
정선 자활영림단 22명은 노숙자도 낙오자도 아니다. 매달 150만원을 벌어들이고 산림경영기사자격증 공부까지 하는 직업인이고 생활인이다. 그들의 숙소가 있는 ‘아우라지’는 서로의 마음을 아우르며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찾아가는 보금자리다.
●자활영림단은
자활영림단은 산림청이 노숙자와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2000년부터 전개한 '숲 가꾸기 공공근로사업'이 발전된 형태다. 2002년 말 공공근로사업이 끝나고 자활의지가 있는 참여자를 대상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취지로 탄생했다. 현재 전국 5개 지방산림청 산하 11개 영림단에서 118명이 활동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정선=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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