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 강릉방면으로 가다 보면 이천 나들목 부근 도로왼쪽에 ‘하이닉스’란 큰 간판이 보인다. 바로 하이닉스 이천공장(경기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 산 136의1)이다. 지난 29일 이 곳을 가봤다.
정문을 들어서자 단지 내 중앙도로 양쪽엔 대형건물이 즐비하다. 하지만 곳곳 페인트칠까지 벗겨져 재건축 아파트단지를 연상케 하는 건물들을 보면 “이 곳이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공장 맞나”는 의심마저 갖게 한다. 사실 하이닉스 이천공장은 1998년 마지막 공장증설이 이뤄진 뒤 아무런 투자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맨 마지막 건물 뒤를 가보았다. 콩밭과 잡초만 무성해 ‘버려진 땅’처럼 보인다. 하지만 1만8,000여평 규모의 이 곳에 하이닉스는 새로운 300㎜ 웨이퍼 생산라인을 짓고 싶어 한다.
300㎜ 웨이퍼는 200㎜ 웨이퍼보다 반도체 칩 생산량이 2.25배나 많은 고효율 라인이다.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D램 반도체 생산 2위인 하이닉스가 일본 대만 중국업체들의 추격을 따돌리려면 300㎜ 웨이퍼 라인을 하루 빨리 구축해야만 한다.
그러나 하이닉스는 이 곳에 공장을 지을 수 없다. 수도권정비계획법상 공장 신ㆍ증설이 불가능한 ‘자연보전권역’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정부에 공장증설허용을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 당했다.
최근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의 ‘빅딜’(정부는 규제를 풀고 기업은 투자를 늘리잔 구상) 제안과 기업규제에 대한 권오규 경제부총리의 전향적 태도 등에 잔뜩 기대를 걸어봤지만, 정부가 지난 28일 발표한 기업환경개선방안에도 끝내 하이닉스 공장증설건은 포함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땅을 실제 보면 과연 ‘자연보전권역’으로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곳인지 의문이 든다. 동쪽엔 이미 하이닉스 공장이 자리잡았고, 서쪽엔 이천 열병합발전소가 바로 붙어 있다. 또 남쪽으론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북쪽은 아파트와 논이 뒤섞여 있다. 인근엔 산도 하천도 없다.
물론 정부측 논리도 일리는 있다. 만약 1984년 법 제정이래 한번도 공장증설을 허용하지 않았던 ‘자연보전권역’에 하이닉스만 예외를 인정해준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수도권 정비계획 자체를 손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하이닉스 이천공장은 상수도보호권역에도 속해 있는데, 수도보호권역에는 중금속을 사용하는 시설은 들어설 수 없다.
그렇다 해도 공장을 지으면 연간 수천억원 매출을 올릴 이 땅을 그냥 콩밭과 잡초로 두기엔 너무 아깝다. 다른 공장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몇 안 되는 품목의 하나이자, 최근 수요급증으로 가격이 급등하는 바로 반도체 공장이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오는 10일 중국 장쑤성 우시시에서 ST마이크로와 합작한 300㎜ 웨이퍼 공장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중국진출이 이천공장 증설실패 때문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국내에서 좌절된 300㎜ 웨이퍼 생산 라인을 결국 해외에 짓게 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해당 부지의 주변환경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법과 규제만 내세워 이미 열병합발전소까지 들어선 땅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행정일 수 밖에 없다”이라고 말했다.
이천=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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