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세상에 ‘안정된 수입’ ‘보장된 정년’이라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세요?” 1일 서울시 지방공무원(7ㆍ9급) 임용시험 필기고사가 치러진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청중. 17번째 7급 공무원 도전이라는 최모(38)씨는 뻔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예전에는 대기업 직원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공무원이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어릴 때는 몰랐던 그런 장점들이 현실적으로 체감된다고 할까요. 여자들이 보는 눈도 달라진 것 같구요.” 최씨가 6년 전 행정자치부 7급 공무원 시험을 시작으로 1년에 3, 4번씩 공무원 시험 도전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나이 들어 시험 본 게 창피하다”며 손사래 치는 그와 함께 걸었다. 사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정도 경기 부천시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했다. 15년 전인 그때만 해도 공무원은 그다지 인기 직종은 아니었고, 응시 인원도 적었다. 최씨도 한 번에 붙었다. 그래도 ‘남들처럼’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는 열망을 누를 수 없어 공무원 자리를 내던졌다. “지금 생각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이죠. 그 좋은 직장을 제 발로 걸어 나왔으니 말입니다.”
이후 대기업 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IMF 이후 좁아진 취업문, 정리해고의 칼바람, 불안정한 비정규직 증가 등 고용 시장의 큰 변화를 겪으면서 공무원이 최고 직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됐다.
지금 그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민도 많다. 무엇보다 직장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벌이도 변변치 않다. 그래서인지 맞선을 봐도 여자들이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고령 장수(長修)생이란 자격지심에 동안(童顔)으로 보이려고 가끔 피부 관리도 한다. 공부는 틈을 내 하는 정도여서 늘 답답하고 조급하다. 9급 공무원 생활을 하다 나온 터라 ‘자존심’ 때문에 7급을 본다.
최씨는 그래도 멈출 수 없다 했다. “쏟아 부은 시간과 돈이 아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60세까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고 연금도 있는데 젊을 때 몇 살 더 투자하는 거야.” 그래서 시험을 본 이날도 쉴 틈이 없다. 2008년부터는 연령 제한에 걸리기 때문이다.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전 이제 다음 시험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갑니다.”
이날 서울시 7ㆍ9급 공무원 932명을 뽑는 시험에는 무려 15만2,000여명(162대 1)이 응시했다. 불안정한 세상에 안정된 공무원을 꿈꾸는 이들이 모인 시험장 분위기는 필사적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부터 머리가 듬성듬성한 30대까지, 시험 종료 직전까지 문제지를 붙들고 끙끙댔고, 마감을 코 앞에 두고 답안용 OMR카드를 바꿔 달라며 애원하기도 했다. 종로구 청운중 시험장을 나서던 박모(32)씨는 씁쓸하게 줄담배를 피웠다. “시험이 어땠는지, 제 사연이 뭔지 묻지 마세요. 기다리는 아내에게 빨리 갈래요.”
유상호기자 shy@hk.co.kr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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