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미국의 대북 정책, 나아가 대한반도 정책을 집행하는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안에 관련된 두 외교관의 말이 반드시 모든 대목에서 일치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버시바우 대사와 힐 차관보의 말이 서로 엇갈렸던 경우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했다.
● 대사, 동아태차관보 엇갈리는 발언
버시바우 대사는 지난달 21일 서울에서 가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하면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 가능성은 한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며 긍정적 답변을 했다. 북한이 확실히 6자회담에 복귀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6자회담 재개 전이라도 평양에 가서 북미 양자 대화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평양행의 주역으로 지목된 힐 차관보는 뉴욕에서 "(언론에 보도된)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은 잘못 인용된 것"이라는 짤막한 말로 자신의 평양행 가능성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버시바우 대사의 말은 북미 양자대화와 관련된 언급 중 가장 전향적인 것이었지만 힐 차관보의 부인으로 미국은 다시 스스로 설정한 금기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미국이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금기는 6자회담 틀 밖에서는 북한과 양자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미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셀리그 해리슨의 말을 신뢰한다면 북한의 당면 최대 목표는 미국과 양자협상을 갖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한 것이나 또 새롭게 영변 원자로에서 연료봉을 꺼내 플루토늄으로 재처리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나 모두 미국을 양자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미국의 금기 유지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실패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원칙, 명분이 걸려있고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6자회담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작금의 상황에선 미국의 태도는 점점 더 막무가내의 고집스러움으로 비치기 시작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 북미 양자대화 나서는 모습 보여야
강성으로 여겨졌던 버시바우 대사가 오히려 유연해졌고 정작 6자회담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의 평양행 의지는 소극적으로 바뀐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며칠 전 한 비공식 모임에서 힐 차관보에게 "북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즉답은 피한 채 북한과의 협상에서 느끼는 '좌절감'을 상당히 길게 토로했다.
그의 말에서는 '북한 피로증'이 매우 짙게 묻어났고 북한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불신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러나 북한 때문에 속이 터지는 심정이야 한국이 열 배, 백 배 더하지 않겠는가.
한 차례에 그치더라도 미국이 북미 양자대화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 나아가 전 세계를 향해 그들의 명분을 축적하는 길이 될 것이다. 미국은 금기를 깨야 하고 힐 차관보는 다시 힘을 내야 할 것이다.
고태성ㆍ워싱턴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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