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폭격(얼차려), 구타, 고문관, 공포의 점호, 짬밥, 똥국(어떤 재료를 써도 색깔이 비슷한 군대 국 요리)…. ‘군대의 추억’을 가진 예비역이라면 항상 귀에 맴도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군이 달라졌다고 한다. 옛 것은 제발 모조리 잊으라고 한다.
하긴 내무반 시설이 개선되고, 군 부대 식사도 좋아졌다는 소식은 틈틈이 듣고 있다. 그렇다고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살에는 군대문화까지 바뀌었을까. 1일 국군의 날을 맞아 달라진 병영문화를 몸소 체험해 봤다. 우선 예전 군기(軍紀)를 십분 불어넣었다. “7년차 예비역 병장 기자 정OO. 9월29일자로 육군 청성부대 전속을 명(命) 받았습니다!”
점호시간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지난달 29일 오후 9시 강원 철원군 육군 청성부대 한 박격포 소대의 일석(日夕) 점호는 단란한 가족의 저녁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병사들은 계급에 상관없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삼육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 벌칙은 계급을 봐주지 않았다. 새파란 이등병들이 게임에서 진 한 선임병의 등을 묵직한 손바닥으로 거침없이 때렸다.
이 같은 ‘점호 게임’은 수직적 인간관계에서 오는 각종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매일 밤 종목을 바꿔 가며 실시되고 있다. 내무반의 막내 이등병은 “입대 전 군에 대해 들은 얘기는 대부분 과장된 것”이라며 “선ㆍ후임 관계는 구타나 얼차려를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닌 대학의 학년 구분과 비슷한 개념인 것 같다”고 했다.
인원점검도 더 이상 ‘공포의 시간’이 아니었다. 번호를 세는 구호는 박력이 넘쳤지만 분위기만큼은 자유로웠다. ‘침상 끝 선에 정렬’이라는 익숙한 구호가 사라진 대신, 병사들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푹신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채 점호를 받았다. 소초장 박유웅 중사는 “전투화 검사 등 사소한 문제로 군기를 잡던 일석 점호가 동료를 칭찬하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평가하는 가족회의시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무쇠처럼 마모되지 않는 것도 있다. 오후 11시를 넘긴 시각의 남방한계선은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눈매는 매섭고 자세는 위엄이 있다.
병영시설
병사들의 의식만큼 병영시설도 좋아 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욕실 화장실 휴게실 세탁실 등을 갖춘 막사다. 병사들은 “호텔 안 부러운 ‘올인원’ 막사”라고 부른다.
내무실의 관물대 역시 달라진 병영문화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한 놈 잡고 전역하자’는 식의 전투적 문구 일색이던 관물대엔 ‘토익 900점!’ ‘몸짱 만들어 전역하자’ ‘일주일에 독서 한 권’ 등 보다 현실적인 바람이 담겨 있다. 정의영 상병은 “군대에서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며 “앞으로 취업 전쟁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병사들의 소지품도 많이 달라졌다. 10년 전만 해도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반입이 금지됐던 샴푸 린스 자외선차단크림 폼클렌징 등이 관물대 곳곳에 놓여 있다. 대형 TV와 침대 역시 내무실을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이름도 내무실에서 ‘생활관’으로 바뀌었다.
내무공간은 0.7평에서 2평으로 늘었다. 2003년부터 최전방부대를 대상으로 시작된 이 병영생활 개선 사업으로 최전방 부대 막사 90%가 신형막사로 교체됐다. 2020년께 전 군의 대대급 막사까지 신형 막사가 확대된다. 식단 역시 흑미(黑米)밥 스파게티 등 신세대 병사들의 입맛에 맞춰 더 이상 ‘짬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한가위 근무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지만 귀한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의 마음은 편치 않은 법. 더구나 한가위(6일)가 코앞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근무 중 이상 무”라고 소리쳤다. 오히려 자신의 안부 대신, 부모님 걱정이다.
그들의 한가위 메시지를 들어 봤다. “한치의 빈 틈도 허락치 않습니다. 내 부모 형제를 최전방에서 지킨다는 각오로 부대원이 똘똘 뭉쳐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추석 즐겁게 쇠십시오.”(정윤섭 상병) “나라로부터 선택 받은 자라는 자부심으로 철책 경계근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안심하십시오.”(유광현 일병)
30일 새벽. 중부전선 남방한계선엔 경계등 불빛에 위안을 삼은 병사들이 경계근무에 열중이다. 그들의 시선은 남쪽 고향이 아닌 북쪽을 향해 있다. 달이 시나브로 차고 있다.
철원= 글ㆍ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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