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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을 秋 저녁 夕, 그리고 다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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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가을 秋 저녁 夕, 그리고 다이어트

입력
2006.09.2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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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란 말과 저녁이란 말은 어떤 의미에선 같다. 가을은 한 해의 저녁이고 저녁은 하루의 가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을과 저녁은 의미가 중첩된 말이다.

가을은 한 해의 저녁이라 가을걷이가 끝난 시점이다. 봄부터 일구어온 농사를 마침내 거두어들인 풍성한 계절이다. 곳간마다 나락이 가득 쌓이고, 잘 익은 과일들로 과실수 가지들은 짓푸른 하늘 아래 한껏 가지를 늘어뜨린다.

저녁은 하루의 가을이라 일손을 모두 놓고 맘 편히 쉬는 시각이다. 추수를 마치고 회청색으로 젖어드는 포근한 어스름에 몸을 맡긴다.

가을과 저녁. 어느 쪽이든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축제가 벌어지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추석 명절이 있고 서양엔 추수감사절이 있다.

가을의 저녁이 축제일 수 있는 것은 혹한의 겨울과 보릿고개의 봄과 비바람의 여름을 고된 노동으로 참고 견뎠기 때문이다. 릴케가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 읊을 수 있었던 것도 가을이라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한 달, 하루 단위로 축소돼버린 삶

가을은 우리의 위대했던 지난 시간들을 증거하는 계절, 비로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참았던 영양을 맘껏 보충한다. 살찐 짐승을 잡아 감사의 제를 올리고 찰진 떡을 빚어 주렸던 배를 채우며 단 술과 기름진 안주로 흥을 돋운다. 사람의 피부세포가 지방질을 비축하게 돼 있는 것도 다시 다가올 겨울과 봄과 여름의 고난을 견디기 위한 것이었다.

시련 속에서 사람이 꿈과 희망과 계획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가을 때문이었다. 가을이란 신의 언약이며 자연의 시혜이며 믿음에 대한 보답이었다. 하늘의 태양이 숨가쁜 공전의 주기를 돌아 제 자리에 당도하는 세월을 삶의 단위로 살아오면서, 땅 위의 인간들은 인내와 지혜와 협동과 나눔을 배웠다.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삶의 단위는 그러나 한 달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계절도 없이 월급날이 곧 추수의 날이 되었다. 그나마도 비정규직 혹은 일용직 근로자들에겐 그 단위가 하루로 줄어들었으며 정처 없는 도시 유목민의 신세가 되었다.

꿈과 희망, 인내와 지혜도 그만큼 짧고 불안하게 쪼개졌다. 하늘의 태양과 달과 바람과 비는 더 이상 언약도 시혜도 보답도 아니었다. 땅 위의 계절은 실종됐고, 그래서인지 고기와 곡식과 채소와 과일은 시절 구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들의 피하지방은 나날이 비대해져만 갔다. 인류가 지켜온 오랜 리듬을 잃으면서 질병을 키웠다.

가을은 우리 모두에게 풍요와 여유, 성취와 너그러움의 계절이었다. 너나없이 손잡고 반기며 나누고 함께하던 축제의 저녁이었다. 지난 계절의 뭉클한 무용담과 미래의 아름다운 계획들로 설레던 시간이었다.

그 가을 저녁의 한복판에 우리의 마음을 닮은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추수를 마친 짚단에 불을 붙여, 원만한 저녁달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들과 숲에 서린 무형의 정령들, 음덕을 베푼 조상들과 함께였다.

● 정신의 비만 치료하는 추석 되길

그러나 이제 가을 저녁은 모두에게 기쁘고 여유로운 시간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는 기대와 만족, 감사와 웃음의 계절이겠지만 또 다른 누구에겐가는 박탈감과 소외감으로 시린 어깨를 쓸어안으며, 외롭게 외롭게 웅크려야만 하는 추운 저녁이다.

둥근달을 보며 피자와 고향의 구수한 빈대떡을 흐뭇하게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기만 큰 텅 빈 그릇이 떠올라 외면하고픈 사람이 있다.

세월이 가도 추석은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그들만의 추석'이라면 축제도 재미도 아니다. 내 기쁨은 내가 아닌 자들의 기쁨이 아니고선 결코 기쁨일 수 없는 것이다. 나누고 함께 하는 오랜 아름다운 풍속이 몸뿐 아니라 정신의 비만을 치료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가을, 저녁이기를.

구효서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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