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를 웃도는 시청률로 안방 관객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MBC 드라마 ‘주몽’과 28일까지 1,297만 관객을 모으며 국내 흥행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영화 ‘괴물’. 올해 한국 대중문화계가 만들어낸 최고 히트 상품이다. 대중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 잡은 두 작품의 제작사 경영권이 최근 치열한 콘텐츠 확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거대 통신기업에 넘어갔다.
KT는 204억원을 들여 ‘주몽’의 제작사인 ‘올리브 나인’의 지분 19.1%를 확보, 최대주주에 오를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올리브 나인은 인기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불량주부’ 등을 만들었으며, 10월 11일 KBS2에서 첫 전파를 탈 드라마 ‘황진이’도 제작 중인 방송외주제작사다.
SK텔레콤은 8월30일 ‘괴물’ 제작사 ‘청어람’의 지분 30%를 계열사 iHQ를 통해 인수했다. 청어람 지분 확보로 SK텔레콤은 iHQ 산하의 아이필름과 함께 굵직한 영화사 2개를 식구로 거느리게 됐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진원지는 SK텔레콤와 KT. 두 회사는 최근 막강한 자금력을 무기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앞 다퉈 엔터테인먼트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CJ와 오리온이 양대 산맥을 형성하던 엔테테인먼트 업계가 4강 체제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CJ와 오리온은 콘텐츠 제작 역량 강화를 모색하며 통신기업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다.
●SKTㆍKT, 불꽃 튀는 기업 인수전
통신기업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인수 경쟁은 지난해 SK텔레콤의 iHQ 지분 인수를 계기로 불이 붙었다. iHQ는 정훈탁 대표의 이름을 딴 ‘훈탁통치’라는 말이 업계에서 나돌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닌 국내 최대 연예매니지먼트 기업. SK텔레콤은 두 차례에 걸쳐 418억원을 쏟아부어 iHQ의 최대 주주(35%)가 됐다. 이에 자극 받은 KT는 지난해 자회사 KTF와 함께 ‘살인의 추억’을 만든 굴지의 영화제작사 싸이더스FNH의 주식 51%을 매입해 맞불을 놓았다.
통신기업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방송, 영화, 매니지먼트, 음반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으로 기업 인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최근 인수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통신기업이라는 정체성이 무색해질 정도다.
SK텔레콤은 iHQ를 전진기지로 삼아 영화제작, 게임개발, 매니지먼트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고 YBM서울음반과 WS엔터테인먼트를 발판 삼아 대중음악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KT는 신현준 강성연 등 연예인 17명이 소속된 올리브 나인을 통해 매니지먼트 사업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싸이더스FNH의 자회사인 ‘악어컴퍼니’는 KT가 공연사업에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할 가능성이 짙다.
●뉴미디어 도입에 ‘콘텐츠 확보’ 발등의 불
SK텔레콤과 KT의 공격적 행보의 목적은 안정적인 콘텐츠 확보. 날로 까다로워지는 유무선 통신 이용자의 입맛을 다양한 콘텐츠로 충족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위성멀티미디어방송(DMB) 상용화에 이어 와이브로(한국형 초고속 무선인터넷)와 IPTV(인터넷으로 연결된 TV) 서비스 도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도 계기가 됐다.
이치형 KT 상무는 “디지털 유통 사업자로서 양질의 콘텐츠를 얻는 것이 1차 목표”라고 말했다. 방송ㆍ통신 융합시대 개막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도 작용하고 있다. 나아가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의 도약도 꿈꾸고 있다. SK텔레콤 최진 전략콘텐츠개발팀장은 “지금은 결정된 것이 없지만 시장 상황에 따라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의 변신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CJㆍ오리온, 콘텐츠 제작 역량 강화로 맞불
기존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멀티플렉스와 케이블 TV를 기반으로 CJ와 오리온이 양분하고 있었다. 현재 케이블 TV 사업에서는 CJ가 오리온을 맹추격하고 있는 상황. 영화배급 시장에서는 만년 2,3위였던 오리온의 쇼박스가 지난해 CJ엔터테인먼트를 제쳤으나 올해는 예측불허의 선두 다툼을 하고 있다. 자존심을 건 건곤일척의 싸움에 통신기업이 새로운 강자로 뛰어든 형국이다.
CJ와 오리온은 일단 SK텔레콤과 KT의 시장 진입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다. 온라인 매체를 근간으로 한 통신기업과 콘텐츠 유통망이 아직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쇼박스 김태성 부장은 “통신기업과 달리 제작 노하우가 축적돼 있는 것도 장점”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두 회사는 콘텐츠 제작 역량 강화로 수성을 준비하는 등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콘텐츠 확보를 둘러싼 일전이 불가피하고, SK텔레콤과 KT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의 변신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CJ 산하 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 제작과 콘텐츠 라이브러리 확충에 전력을 쏟을 태세다. 조장래 홍보팀장은 “생존을 위해 해외시장 개척과 더불어 TV蒻窄뗄?애니메이션 등 신규 콘텐츠 사업 진출도 적극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CJ미디어는 자체 제작 비율이 40% 이상인 종합 오락채널 tvN을 10월 9일 개국한다. CJ미디어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자체 콘텐츠 확보가 절실하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CJ뮤직은 최근 1년 사이 9개의 음악 관련회사에 지분 투자를 했다.
오리온의 미디어플렉스는 최근 인네트와 함께 영화제작사 모션 101을 출범시켰다. 온미디어는 대형 TV드라마 ‘썸데이’ ‘에이전트 제로’ 등을 잇따라 기획해 경쟁력 높이기에 나섰다.
고정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SK텔레콤과 KT는 풍부한 자금력, CJ와 오리온은 오랜 경험이 무기”라며 “4강간 경쟁이 앞으로 더 치열할 것” 이라고 전망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 몰리는 돈, 약인가 독인가
"통신기업의 투자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 줄 대는 영화사들이 많습니다." 지난해 SK텔레콤이 iHQ를 인수한 직후 한 영화제작사 대표가 했던 말이다. SK텔레콤이 될성부른 영화사를 또 다시 물색 중이라는 소문과 함께 KT도 조만간 영화사를 인수한다는 설이 떠돌던 상황이었다. 영화 제작사 입장에서는 통신기업의 자금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콘텐츠 생산을 꾀할 수 있고, 업계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통신기업이 콘텐츠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SK텔레콤과 KT의 최근 행보는 통신 인프라의 발달이 가져온 결과다. 현재 일본 NTT도코모 등 해외 거대 통신기업은 제작사와의 제휴를 통해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다.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SK텔레콤과 KT의 시장 진입을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신현택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장은 "아시아를 넘는 세계적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동안 자금이 부족했다"며 환영했다. 그는 또 "유통 부문이 약한 제작사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심재명 MK픽처스 대표도 "투자 활성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장의 구조적 모순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대기업이 음원 확보에만 매달리고 새 음악 개발을 등한시 하고 있는 대중음악계에서 많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 박준흠씨는 "자금 유입은 긍정적이지만 새로운 음악인을 키우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대기업이 지금처럼 단기 수입에만 급급하면 오히려 시장이 위축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영화계는 '홀드아웃'(Holdoutㆍ수익 극대화를 위해 비디오 출시 및 TV 방영 등에 일정기간 유예를 두는 것)의 붕괴를 걱정하고 있다. 실제 TU미디어는 지난해 11월 계열사 아이필름의 '새드무비'를 종영도 하지 않고 위성DMB로 방영해 논란을 불렀다.
많은 중소 제작사의 입지가 축소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통신기업과 대기업이 지분을 보유한 제작사의 콘텐츠만 자사 유통망을 통해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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