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 지음ㆍ김승욱 옮김 / 해냄 간행ㆍ1만3,000원
같은 시공간에서 자신과 똑같은 대상을 보게 되는 ‘도플갱어’(분신ㆍ생령) 현상은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많은 예술 작품에서 단골 소재로 사용돼왔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비롯해 ‘도플갱어’라는 직설적 제목을 단 영화도 미국과 일본에서 나왔었고, ‘옹고집전’ 등 우리 전래동화에서도 심심찮게 그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세계 공통의 이 흥미로운 모티프를 소재로 ‘나는 무엇으로 인해 나인가’를 물은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84)의 장편소설 ‘도플갱어’(2002년)가 국내에 초역됐다. ‘눈먼 자들의 도시’(1995) ‘동굴’(2000)과 함께 이 포르투갈 작가의 ‘인간조건 3부작’ 중 하나다.
성실한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어느날 수학교사가 추천한 비디오 한 편을 보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단역배우를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외모, 목소리, 심지어 팔뚝에 난 사마귀까지 똑같은 이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남모르게 그의 신원을 추적한 막시모 아폰소는 안토니오 클라로라는 그의 본명과 주소까지 알아내고 그의 분신과 만난다. 그리고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가를 가리는 존재론적 대결을 벌여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던 소설은 막시모 아폰소와 클라로의 만남에 그의 연인과 아내가 연루되면서 소용돌이처럼 몰아친다. 클라로의 아내 헬레나는 막시모 아폰소의 존재로 인해 충격을 받아 신경이 갈기갈기 찢어져버리고, 클라로는 망가진 결혼생활에 대한 복수로 그의 연인인 마리아와의 하룻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기에 막시모 아폰소는 너무 겁이 많고 소심했다. 자신의 분신이 세상에 드러나는 게 두려운 그는 말없이 자신의 옷가지를 분신에게 내주고, 함무라비 법전의 계명에 따라 혐오스런 분신의 옷가지와 결혼반지를 몸에 걸친 채 또 다른 복수를 도모한다.
노골적으로 ‘나 여기 있소’ 하고 얼굴을 내미는 이 소설의 ‘뻔뻔한’ 화자는 친절하게도 “넌 여분이 아니었다. 너 대신 나타나서 네 어머니의 옆자리를 차지할 복사본은 없다. 너는 독특한 존재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독특한 존재이듯이. 진정으로 독특한 존재이듯이”(413쪽)라는 문장들로 소설의 주제를 요약해준다. 이 개성 강박의 시대, “최악의 증오는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은 것을 참지 못하는 증오”다. 하지만, 달라 보이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인가. 같아 보이는 것은 정녕 같은 것인가.
클라로와 마리아가 죽은 이후 홀로 남겨진 헬레나가 막시모 아폰소의 손가락에 죽은 남편의 반지를 끼워주는 장면과 영겁회귀처럼 또 다른 분신이 그를 찾아오는 마지막 장면은 유머와 익살로 시종하던 이 소설에 신화적 기운을 불어넣는다. 우주와 일상을 동시에 통찰하는 거장의 힘을 실감케하는, 책장을 덮은 후 깊은 한숨을 토해내게 하는 작품이다.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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