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삼성그룹에'장하성 노이로제'라는 게 있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을 이끌며 삼성전자 등의 주주총회 때마다 이건희 회장 일가의 아킬레스건인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참여연대는 올해 주총투쟁을 철회했고 장 교수는 7월 말 한 강연회에서 이 회장을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 평가해 화제를 모았다. 이 회장의 업적을 평가하며 책임을 강조하는 뜻이라고 했다. 지금 장 교수의 타깃은 태광그룹이고, 수단은 이른바 '장하성 펀드'다.
▦ 1998년 12월'뮤추얼펀드'라는 낯선 금융상품과 함께 박현주라는 인물이 나타나 간접투자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11년 간의 증권사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한 그는 불과 4년 만에 미래에셋을 앞세운 자산운용사와 증권사 등을 잇달아 세워 금융그룹을 건설하고 2001년 회장에 취임했다.
초고속 성장의 배경을 뜨악하게 보는 눈도 적지 않았지만 시장흐름과 돈의 생리를 궤뚫는 그의 평판은 날로 높아져 미래에셋이 운용하는 펀드자산은 18조원대에 이른다. 삼성투신운용과 다투는 국내 최대급 자산운용사를 일군 그의 요즘 관심은 투자와 성장이다.
▦ 동향에다 대학동문의 인연이 있으나 살아온 역정이 다르고 5년의 터울까지 져 만날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이 최근 묘한 곳에서 맞닥뜨렸다. 박 회장이 "돈을 쌓아 놓고도 투자를 게을리한 채 외국펀드 등의 요구에 따라 배당에만 신경 쓰는 기업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발단이다.
배당과 주가 제고를 통한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주주 행동주의'의 칼을 치켜들고 외국 자산운영사를 동원해 태광 계열사를 압박하던 장 교수로선 적잖이 신경에 거슬렸을 법하다. 언론까지 '증시판 성장-분배 논쟁'이 불붙었다고 부추겼으니까.
▦ 장 교수의 반론도 경청할 만하다. "투자할 돈을 배당으로 달라는 것은 잘못이지만 투자계획도 없으면서 배당도 하지 않는 것은 단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낮추고 장기적으로 소비도 위축시켜 성장도 억누르게 된다." 펀드의 자금력을 빌려 기업경영에 큰 목소리를 내는 '펀드 자본주의' 시대의 명암을 따져볼 기회였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의 논쟁은 이어지지 않았다.
펀드의 목적ㆍ성격ㆍ역할이 다른 데다, "투자자들의 돈으로 시장과 기업을 흔든다"는 비판이 나와서다. 돈을 둘러싼 얘기는 늘 복잡하기 마련이지만 시대의 명망가들이 나눈 얘기는 다시 곱씹어볼 만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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