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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콩 세는 사람들과 인문학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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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콩 세는 사람들과 인문학의 위기

입력
2006.09.2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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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미국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용어로 '콩 세는 사람(bean counter)'이란 표현이 있다. 주로 통계 수치와 이윤 문제를 중심으로 주장이나 논거를 펼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다분히 냉소적인 어감이 묻어난다.

● 너희들도 콩이나 세라고?

이른바 IMF체제를 거친 후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에도 곳곳에 '콩 세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시장성과 수익성을 지고의 신으로 떠받들면서 모든 현상을 경제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하고 진단하고 처방하는 논리가 득세하고 있다.

최근엔 지난 연대의 '운동권' 탈주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들 세력에 가담해 과거 그들의 입에서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정책과 강령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점증하는 시장 논리의 확산 앞에서 적절한 대응 방안을 강구하지 못한 채 무력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로 인문학이다.

적어도 대학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으며 그저 미약한 징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방치돼온 만성적 질환이란 점을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전국 주요 대학의 인문대 학장들이 성명서를 발표해 정부와 사회를 향해 그 해결을 호소할 정도로 인문학의 위기는 중증이 되어버린 상태이다.

그러나 막상 성명서가 발표되고 난 후 언론이나 여론의 반응을 보면 기대만큼의 대중적 이해나 정책적 배려가 따라주지는 않는 듯하다. 인문학에 대한 고전적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인문학과 타 학문, 혹은 인문학과 시장의 관계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다음 인문학 분야 종사자 역시 실용성 제고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당한 충고로 끝을 맺는 설교가 잇따르고 있을 뿐이다.

'콩 세는 사람'들의 등쌀에 무너져내리는 인문학의 종사자들을 향해 너희들도 고고한 척하지만 말고 어서 콩 세는 일에 분발하고 나서야 한다고 등을 떠미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으니, 한편으로 웃음이 나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마도 인문학 전공자가 상당수를 차지할 저널리즘 종사자들마저 인문학의 위기를 단순히 강 건너 불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다면 이는 참으로 위태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은 단지 대학 구성원의 밥그릇 지키기 차원의 소산이 아니며 학과간 구획 조정이나 시장성 있는 주제 선택으로 해결 가능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 제기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인문학의 쇠퇴는 특정 학문의 위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비판정신의 소멸과 역사적 방향 감각의 상실을 초래할 것이고 이는 다시 사회적 파편화, 문화의 천박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 우리 지식사회 희망 없나

인문학의 위기는 시장 패러다임의 지배가 전면화된 사회에서 대학이 처한 곤경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인문학은 '돈 많은 소비자'를 길러내는 데 그리 큰 관심도 재능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콩 세는 데 분주한 대낮에 때로 진정한 사람을 찾는다며 벌거벗은 채 등불을 들고 나타난 디오게네스 같은 철학자의 존재도 필요하지 않을까. 인문학의 위기를 '그들만의 걱정거리'로 여긴다면 우리 지식사회에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남진우 시인ㆍ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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