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법정 / 마이클 리프 등 지음ㆍ금태섭 옮김 / 궁리 발행ㆍ2만5,000원
1975년 4월 15일, 미국 뉴저지에 사는 스물 한 살의 카렌 앤은 친구 생일 파티에서 술 몇 잔을 마신 뒤 의식을 잃는다. 병원에 실려가서도 의식을 못 찾고 영구적인 식물인간 상태라는 진단을 받는다. 코에 삽입된 튜브로 영양을 공급 받고, 인공호흡기로 숨쉬기를 이어가지만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의식을 잃은 지 3개월, 딸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원한 부모는 병원측에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희망 없는 식물인간 환자라 하더라도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믿은 주치의는 요구를 거부한다.
문제는 결국 법정으로 옮겨갔다. 카렌의 부모측은 현대의학이 치료법을 주지 못한 채 깨어날 가망이 없는 사람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반면 주치의측은 살아날 확률이 백만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누구도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맞섰다.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이듬해 3월 31일 법원은 최종 판결을 내린다. “현실적으로 지각을 찾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가 카렌에게 식물인간이라는 견디기 어려운 상태를 유지하라고 강제할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결국 호흡기를 뗐지만 카렌은 놀랍게도 혼자서 호흡을 하며 85년 6월 11일 폐렴으로 숨질 때까지 9년이 지나도록 목숨을 이어갔다.
이 판결이 있은 뒤 미국에서는 안락사를 희망하는 생전 유언과 생명유지장치를 거부하는 사전 지시가 가능해졌고, 병원은 윤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유사한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대처가 본격화했다.
법정은 세상의 갈등, 다툼, 모순이 모이는 공간이지만 다툼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와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판결이 내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 페퍼다인 로스쿨 교수 미첼 콜드웰과, 캘리포니아주 벤추라 카운티 차장검사 마이클 리프가 쓴 이 책에 그 같은 판결이 모여있다.
흑인 노예선 아미스타드호의 재판은 훗날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극적이었다. 1839년 아프리카에서 납치된 흑인들이 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쿠바 아바나항에서 아미스타드호에 태워진다. 배고픔과 채찍질을 견디다 못한 노예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키지만, 운항을 하라며 살려둔 ‘노예 주인’들이 배를 미국에 정박시킨다. 이때부터 스페인과 미국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살해된 선장이 스페인 사람이고 스페인은 노예매매가 합법적이었던 반면, 미국은 이미 노예매매를 금지하고 있었다. 스페인측 변호인은 국가 조약의 의무에 따라 선박과 그 부속물은 자국인 스페인에 넘겨주어야 하며, 재산 보호 및 반환 조약에 근거해 노예도 재산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 변호사는 노예 제도의 부당성과, 노예를 상품으로 규정한 조약상의 비윤리적 문제, 아프리카인에 대한 대법관들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인간의 불가침 인권을 주장했다. 결국 법원은 아프리카인이 납치된 자유인이면 미국은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흑인들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이들은 자유인이 돼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갔고 1865년 미국은 노예제도를 공식 철폐했으며 스페인은 청구권을 포기한다. 노예제도의 잔인성과 부당성을 고발하고 피부색에 의해 인간의 자유가 박탈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200년에 걸친 끔찍한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게 한 판결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선 라디오 DJ 존 헨리 폴크, 여성 투표권 쟁취에 나선 수전 앤서니, 영국 총독부에 맞서 언론 자유를 부르짖은 식민 시절 미국의 언론인 존 피터 젱어, 표현의 자유를 주창한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 무능한 변호사와 법원 때문에 강제 불임 시술을 받은 캐리 벅 등의 이야기도 책에 담겨 있다. 이들을 둘러싼 법적 공방은 당시 혹은 지금 치열한 논쟁이 됐거나 되는 문제들이다.
번역자는 현재 서울중앙지검 검사로 최근 한 일간지에 ‘수사받는 법’을 연재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특히 배심제에 관심이 많은 데, 책이 다룬 사건도 배심제 하에서 재판이 진행된 것들이다. 판결의 역사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시종일관 정치한 논리와 예리한 공방으로 전개되는 법정 논쟁은 그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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