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휴일을 포함하면 9일이나 되는 기나긴 올해 추석연휴. 놀 시간은 넘치고 볼 영화도 많다. 길어진 연휴에 화답하듯 충무로는 무려 6편의 영화로 추석맞이를 한다. 각기 다른 개성으로 대목을 노리는 추석 한국영화를 소개한다. 추석 성찬으로 무거워진 몸, 외출이 꺼려진다면 여러모로 개봉작과 닮은 점이 많은 ‘한 핏줄 영화’ DVDㆍ비디오 출시작을 즐기는 것도 좋다.
●라디오 스타-이준익 감독이 연기시범?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안성기 박중훈 콤비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7년만에 재결합한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한물간 사고뭉치 록 가수 최곤(박중훈)과 속 깊은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우정이 동강을 껴안은 강원 영월읍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는 한때 대중을 사로잡았던 라디오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사람들이 잊고 지내는 삶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상상력이 죽고 인간다운 정이 사라진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도 되묻는다.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등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팝송과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등 옛 가요가 어우러지며 경쾌하면서도 따스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감동과 웃음 사이에서 감정의 완급을 매끄럽게 조절하는 이 감독의 연출력도 일품. 영화 속 주인공처럼 18년의 인연을 이어온 안성기 박중훈의 연기도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영화가 주는 작은 재미 하나. 성질 사나운 중국 음식점 주방장으로 카메오 출연한 이 감독의 연기도 좋은 눈요기거리다. 따스한 웃음으로 가슴을 흠뻑 적시는 영화다. 작품성★★★☆ 오락성★★★
●타짜-조승우 손기술 진짜래요
허영만 원작의 인기 만화 ‘타짜’ 중 ‘지리산 작두’ 편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순박했던 청년 고니(조승우)가 타짜(도박 전문가를 뜻하는 은어)로 거듭나 음모와 배신이 가득찬 도박판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양한 인물 군상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로간에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원작의 방대한 내용을 2시간 19분의 상영시간 안에 촘촘한 이음매로 연결한 수작이다. ‘범죄의 재구성’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한 최동훈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다. 전국 제일의 타짜인 평경장 역을 맡은 백윤식, 사기 도박판 ‘설계사’ 정 마담을 연기한 김혜수, ‘죽음의 타짜’ 악귀 역의 김윤석 등이 서로 밀고 당기며 이뤄내는 연기 앙상블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노름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지만 명절에 벌어지는 화기애애한 화투판 같은 내용을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도박 세계의 잔혹함과 비정함,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대형 망치로 손을 내리찍거나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장면은 추석 볼거리로는 좀 잔인하다. 작품성★★★★ 오락성★★★★
●구미호 가족-서울 한복판 여우가 산다
인간의 간을 찾아 서울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구미호 가족의 좌충우돌을 춤과 노래로 엮어냈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뮤지컬 코미디다.
‘전설의 고향’식 옛 이야기 틀에 머물렀던 구미호 전설을 현대적 감각으로 끌어안으며 새로운 형식미를 가미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공포와 코미디, 스릴러, 멜로 등 여러 장르를 가로지르며 독특한 빛깔의 판타지 세계를 빚어낸 것도 눈 여겨 볼 점.
주현 하정우 박준규 등 개성 만점의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엉뚱, 살벌한’ 에피소드들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빛과 어둠을 자유롭게 조절하며 남산을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출한 화면도 볼거리다.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구미호 가족을 통해 인간성의 복원과 가족애의 중요성을 슬쩍 버무린 것도 추석영화로서 무난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힘보다는 화려한 외형과 코믹한 상황 설정에 기대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약점이다. 영화의 악센트 구실을 해야 할 춤과 노래가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것도 재미를 반감시킨다. 무난한 장르의 영화를 원하는 관객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든 작품. 대신 마음의 문을 열면 낯선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묘한 매력을 지닌 영화다. 감독 이형곤, 15세. 작품성★★★ 오락성★★☆
●잘 살아보세-웰컴투70년대 동막골
1970년대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는 ‘잘 살기 운동’의 한 방편으로 군사작전 펼치듯 산아제한 정책을 밀어붙인다. 전국 출산율 1위를 차지하던 시골마을 용두리는 당연히 요주의 지역. 용두리에 파견된 가족계획 요원 박현주(김정은)는 현지 주민 변석구(이범수)와 손잡고 피임법을 설파하며 마을 사람들의 ‘밤일’ 관리에 나선다.
‘잘 살아보세’는 가족계획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되짚는다. 산아제한 정책은 세월이 흘러 출산장려정책으로 바뀌었지만 가족계획의 의미는 변함이 없다. ‘잘 살아보세’가 단순히 ‘엄마 어렸을 적에’ 라든가 ‘그때 그 시절’ 형식의 추억 탐방 영화에 그치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메시지를 지니는 이유다. 풍성한 웃음거리와 사회성을 함께 갖춘 영화는 초반부 재미와 의미를 한꺼번에 던져준다.
김정은 이범수가 앙상블을 이룬 코믹 연기도 발군이지만, 홍지민 박준면 등 뮤지컬 배우 출신 조연들의 맛깔스러운 감초연기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계급간의 갈등과 관습의 폐해를 파고들며 질펀한 성적 농담을 안겨주는 영화는 아쉬움도 많이 남긴다. 후반부 두루뭉실한 휴머니즘으로 급작스레 막을 내리며 차곡차곡 쌓아놓은 메시지들을 순식간에 휘발한다. 감독 안진우, 12세. 작품성★★☆ 오락성★★☆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 탁재훈 웃음폭탄 볼 만
1편(520만명)과 2편(570만명)이 모두 대박을 터트린 ‘가문의 영광’ 시리즈의 3편. 김수미 신현준 탁재훈 김원희 등으로 ‘신장개업’ 했던 2편의 연장선상에 있다. 2편의 출연진이 고스란히 출연하고 정용기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아 말초적인 웃음을 확대 재생산한다.
검사 며느리를 맞아 조직폭력의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김치 사업에 뛰어든 백호파가 상대방 조폭의 음모를 뿌리치고 가문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기본 줄기.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김수미와 물이 오른 탁재훈의 능청스런 연기가 폭소의 방점을 찍는다. 특히 홍덕자 여사(김수미)가 엉터리 일본어를 구사하며 원맨쇼를 펼치는 홈쇼핑 방송 장면이 웃음의 절정을 이룬다.
남성 성기를 웃음의 지렛대로 삼거나 차에 치어 죽은 사람의 몸이 벽을 뚫는다는 설정 등 2편의 내용을 살짝 비튼 안일한 연출이 눈에 거슬린다. 이야기의 논리적 전개보다 얼기설기 엮은 에피소드가 무게 중심을 잡기에 극적 긴장감도 떨어진다. 민망하더라도 한바탕 웃고 싶은 관객들이 큰 불만 없이 즐길 수 있는 ‘시간 죽이기’ 영화.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지만 온 가족이 즐기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작품성★★☆ 오락성★☆
●무도리-노인들 표정 심상찮네
몇몇 노인들이 궁핍하게 살아가던 강원도 두메산골 무도리는 갑작스러운 도시 젊은이들의 행차로 들썩인다. 멀쩡한 사람도 홀려 목숨을 내던지게 한다는 자살명당 ‘도깨비 골’로 자살 희망자들이 몰려들어서다. 노인들은 유가족이 쥐어 준 돈맛을 알게 되면서 자살 기도자를 적극 유치하려 한다. ‘자살 클럽’ 회원이 몰려들지만 세상의 별난 일을 취재하던 방송작가가 무도리에 잠입하면서 착착 진행되던 노인들의 ‘자살 사업’은 난관에 부딪힌다.
‘무도리’는 다른 추석영화에 비하면 등장배우나 이야기 모두 소박하다. 눈길을 확 끄는 스타 배우 대신 중견 배우들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깊이 있는 웃음을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 얼개지만 단출한 웃음에 승부를 건다.
얼굴의 주름 수만큼 연륜이 깃든 박인환 최주봉 등 노장 배우들의 호연을 높이 살만하다. 젊은 시절 아들과 헤어진 노인 구봉기(박인환)가 자살에 얽힌 깜짝 진실을 대면하는 후반부 장면이 인상적이다. 추석을 맞아 가족의 소중함과 애틋함을 깨닫게 하는 점도 이 영화의 미덕. 그러나 웃음과 감동이 찰기를 잃고 엇박자를 맞추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감독 이형선, 15세. 작품성★★ 오락성★☆
●굿모닝 베트남(DVDㆍ비디오 출시)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라디오 DJ의 파격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 웃음과 휴머니즘을 다룬 점이 '라디오 스타'와 닮았다. 라디오 DJ 애드리안(로빈 윌리엄스)이 정훈장교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방송을 진행해 인기를 얻는 모습도 '라디오 스타'의 최곤과 유사하다.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등 귓가를 맴도는 음악들도 흡입력이 강하다. 감독 베리 레빈슨, 15세.
●스팅(DVDㆍ비디오 출시)
'내일을 향해 쏴라'의 명콤비 로버트 레드포드, 폴 뉴먼이 호흡을 맞춘 고전. 포커의 명수 후커(로버트 레드포드)가 두목의 복수를 위해 콘도르프(폴 뉴먼)와 손잡고 암흑가 거물의 돈을 노리는 과정이 경쾌하게 그려진다. '타짜'처럼 상대방을 속이는 전문 도박꾼 '콘맨'이 등장하고, 이야기가 치밀하게 전개된다. 도박의 어두운 이면에 초점을 맞춘 '타짜'와 달리 코미디 성격이 강하다. 감독 조지 로이 힐, 15세.
●조용한 가족(비디오 출시)
'코믹 잔혹극'이라는 낯선 장르를 내세우며 국내 영화계에 코믹 호러물 붐을 일으켰던 작품. 장사를 해본 적 없는 일가족이 외딴 산장을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일들을 차가운 웃음으로 묘사했다. 새로운 장르적 실험과 섬뜩한 웃음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구미호 가족'과 '한 핏줄 영화'다. 박인환 나문희 최민식 송강호 등 등장 배우들의 연기대결도 볼만하다. '반칙왕'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 데뷔작이다. 18세.
●웰컴 ?동막골(DVDㆍ비디오 출시)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둔 동명 연극을 옮겼다. 외부와 단절된 산골 마을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다루고 있다.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현대 문명과 맞닥뜨리면서 야기되는 코믹한 설정이 '잘 살아보세'와 유사하다. 웃음과 메시지를 균형감 있게 전달하려는 시도도 닮았다. 800만 관객을 불러모은 지난해 최고 흥행작이다. 감독 박광현, 12세.
●투사부일체(DVDㆍ비디오 출시)
'가문의 영광' 시리즈와 함께 조폭 코미디의 속편 성공 신화를 이룬 작품. '두사부일체'에서 조폭 신분으로 고등학교에 진학, 만학의 꿈을 이룬 계두식(정준호)이 대학까지 마치고 교생 실습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황당한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다. '가문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전편과 흡사한 자극적 대사와 폭력 장면을 반복하며 '묻지마 웃음' 공세를 퍼붓는다. 국내 코미디 영화 최다 관객 기록(620만명)을 지니고 있다. 감독 김동원, 15세.
●마파도(DVDㆍ비디오 출시)
로또 1등 당첨권을 들고 잠적한 여자를 찾아 외딴 섬 마파도에 잠입한 재철(이정진)과 충수(이문식)가 겪게 되는 엉뚱한 모험담을 담았다. 지도에도 표시돼 있지 않을 정도로 오지인 마파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5명의 노파뿐. 재철과 충수는 노파들의 등쌀에 시달리다 조금씩 정을 쌓아간다. 시골 노인들과 외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우스개가 '무도리'를 닮았다. 휴먼 코미디 장르도 두 영화의 공통점. 감독 추창민, 15세.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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