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연휴가 곧 시작됩니다. 올해 추석 연휴는, 절기와 기념일의 유쾌한 조화로, 예년보다 훨씬 긴 휴식을 즐길 수 있을 듯합니다. 귀성의 고행과 이런저런 부대낌을 겪은 뒤 찾아올 조용한 침잠의 시간, 그 시간을 이 좋은 책들과 함께 지내보면 어떨까요. 문학ㆍ인문학 출판사의 눈 밝은 편집자들이, 읽어서 좋았던 책들을 추천했습니다. /편집자주
김도언 샘터사 출판사업부 차장ㆍ소설가
한가위, 고향에 두고 온 풍경들이 그리워지겠지요.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김열규 등ㆍ눈빛)는 머리말에 ‘낡고 늙어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을 추억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하다’고 적었습니다. 책은 우리 추억 속 고향의 아스라한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누추했던 시간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선우의 사물들’(김선우ㆍ눌와)은 우리 주변에 흔하게 던져져 있는 사물들, 예컨대 의자 거울 부채 등을 깊은 사색과 언어의 공명을 통해 새롭게 환기시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내 주변의 사물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제 위치를 찾아주는 성찰의 시간일 수 있다면 이 책은 그 행복한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나눔’(데이브 토이센ㆍ해냄)은 구호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저자가 나눈다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책입니다.
아무것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고 하네요. 한가위의 여유를 이웃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고 돌려준다면 이 가을이 훨씬 풍요로워지겠지요.
김병호 문학수첩 편집장ㆍ시인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김소연ㆍ민음사)는 말랑말랑하지 않아서 오히려 가을에 어울립니다.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 남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해질녘에, 행간이 더 깊어지는 시집입니다. 지난 봄 꽃피는 장관에 그만 눈이 감아지던 이들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몸 늙는 대로 마음도 따라 늙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도요. ‘캘리포니아’(김영주ㆍ안그라픽스)는 굳이 그곳이 아니어도 좋을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숨 가쁘게 살아온 20년의 직장 생활을 접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떠난 여행. 작가는 그 낯선 곳에서 일상적으로 살아보고 싶은 ‘머무는 여행’을 욕망합니다. 산타모니카의 낯선 교차로에서 해야 하는 비보호 좌회전 같은, 여행의 불안과 설렘이 전해집니다. ‘목소리의 무늬’(황인숙ㆍ샘터)는 골라 읽는 재미와 엿보는 민망함이 막상막하인 책입니다.
밤참을 내놓으라며 우는 고양이가 행여 무슨 다른 마음이 있어 우는 건 아닌지, 불편해 하는 시인의 마음자리가 넓고 따뜻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본새를 알면서도 짐짓 에돌아가는 시인은 ‘헤어지기 힘들어서 만나기 두려워라’라는 긴 별호의 친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정이 왜 병인지도 알겠습니다.
김현경 그린비 편집주간
‘뉴욕 타임스’로부터 ‘의학의 계관시인’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경학 전문의 올리버 색스가 우뇌 이상 환자의 사례를 담은 책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이마고)입니다. “인간이 어떤 부분을 상실하거나 손상 당한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새롭게 적응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 증상만 보면 기괴하거나 지능이 떨어진다고 할 만한 사례를 모아 따뜻한 시선과 문학적 문체로 풀어 썼습니다.
‘새빨간 미술의 고백’(반이정ㆍ㈜월간미술)은, 현대 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리거나 캔버스 한쪽을 죽 찢어놓고 작품이라 이름 붙인 현대미술을 보고 당혹스러워 하는 당신에게, 평론을 곁들여 최근 미술 작품을 보여줍니다.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주눅들지 말고 작품을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시리즈 만화 ‘해피’(하마 노부코ㆍ대원씨아이)는 맹인견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사고로 실명한 주인공이 맹인견 해피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인데요, 시력 잃은 이의 좌절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잘 표현했고 사회적 편견도 꼬집습니다.
정은미 열린책들 유럽문학팀장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페터 회ㆍ마음산책)은 추리 소설의 모든 미덕을 겸비한 소설입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잘 짜인 스토리, 독특한 소재와 깊은 사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무리 없이 엮어 낸 탁월한 글 솜씨.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부담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첫 페이지를 넘기면 마니아들이 왜 십 년 넘게 복간을 기다려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 고양이 시시’(슈테파니 츠바이크ㆍ베텔스만)는 자기 주인을 양녀라고 부르며 애정 문제까지 관여하려 드는 도도한 시암 고양이와 정신과 의사 율리아의 유쾌한 동거를 그립니다. 자기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고 하는 철없는 주인과 작은 일에 쩔쩔 매는 고객, 그리고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某?시시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결국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페넬로피아드’(마거릿 애트우드ㆍ문학동네)는 ‘서양 문학 최고의 고전 오디세이아를 통쾌하게 뒤집어 버린 거침없는 입심!’이라는 출판사 서평 그대롭니다. 모처럼 긴 연휴이니 이 기회에 ‘오디세이아’도 함께 읽어 보는 건 어떨까요.
조윤형 열화당 편집장
‘성서’의 내용을 접하고 싶어도 원전으로 제대로 읽는 일은 무척 힘듭니다. 그런 분들에게 ‘한 권으로 읽는 성서 이야기’(아토다 다카시ㆍ가람기획)를 권합니다.
추리작가이면서 종교 관련 에세이를 써 온 저자가 성서의 정수를 소개합니다. 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성서와 기독교의 구조, 내용상의 맹점과 핵심 등에 객관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속도감 있는 문체가 매력적입니다. ‘라마야나’(C. 라자고파라차리ㆍ한얼미디어)는 세계 최장의 서사시이자 힌두 문학의 백미입니다. 힌두의 신화가 낯설지 모르지만, 비슈누신의 화신인 라마의 파란만장한 무용담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신화와 종교의 편식증을 치유해주면서 풍성한 흥미도 선사할 것입니다. ‘숫타니파타’(법정 옮김ㆍ이레)는 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입니다.
언뜻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거창하고 현학적인 불교 교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에 대해, 모순과 갈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해탈의 저 세계로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와 초기 불교의 순수하고 소박한 사상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한필훈 휴머니스트 편집주간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김시천ㆍ웅진지식하우스)은 제자백가의 고전에 담긴 사상을 성인이나 군자의 시각이 아닌 소인, 곧 평범한 일상인의 눈으로 읽어 낸 전복적 사고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인문학적 깊이와 경쾌한 글쓰기가 조화를 이룬 수작이지요. 보통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위대한 철인이 아니라 소시민의 등을 두드려 주는 인간적인 공자와 맹자, 장자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1부의 2장 ‘정의 인간학’은 인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탁월한 사색을 보여줍니다. 버스 속이 맞을까, 버스 안이 맞을까 헷갈릴 때가 있지요?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김경원 등ㆍ유토피아)를 읽으면 그 같은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우리말 단어의 미세한 의미 차이를 자세히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국어의 풍부하고 미묘한 맛이 느껴집니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래리 고닉ㆍ궁리)가 좋겠습니다. 책에 담긴 정보량이 방대하고 편집력, 비평적 관점과 유머가 돋보이는 교양 세계사입니다. 복잡다단한 세계의 역사를 가뿐한 마음으로 즐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