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의 해망동은 사라져가는 옛 풍경을 간직한 채 퇴락해가는 동네다. 4차로 도로 건너 바다가 보이는 월명산 비탈에 다닥다닥 집이 들어앉은 이 곳은 시간이 멈춘 듯 하다. 낮고 허름한 집들을 이리저리 이어주는 좁고 복잡한 골목길에는 개똥과 버려진 가재도구가 뒹군다.
200명 남짓한 주민은 노인이 대부분이고, 빈 집이 많아서 활기라곤 찾기 힘들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쌀을 빼앗아서 실어가는 항구로, 해방 후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목재산업으로 잘 살았다. 타지에서 일하러 들어오는 노동자들로 해망동 집마다 빈 방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지금은 초라한 동네가 되었다. 수익성이 없어서 재개발 계획도 없다. 다만 영화 촬영팀은 자주 온다. 남루하고 스산한 동네 풍경이 영화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소년, 천국에 가다' '구미호 가족' 등이 여기서 촬영됐다.
이런 곳에서 미술은 삶의 질을 바꾸는 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젊은 미술작가 20여 명이 지난 7월 말부터 이 동네에 들어와 작업을 시작했다. 문화관광부가 복권기금으로 올해부터 시작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다.
이 사업은 민간기구인 공공미술추진위원회(위원장 김용익 경원대 미술학과 교수)가 맡아서 전국 11 군데에서 '아트 인 시티'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이다. 9월에 부천의 원종동 사회복지관 놀이터 작업을 마친 것을 시작으로, 다른 지역도 11월 중순까지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해망동 프로젝트의 작가들은 빈 집과 담벼락, 골목길에 작업을 했다. 동네의 기억과 주민의 개인사를 사진과 영상, 설치 등으로 담아내거나,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골목길 계단에 얌전하게 나뭇잎과 꽃을 프린트했다.
축대 길을 따라 대나무 장대 끝에 바람개비를 달아 세운 행렬이나, 기왓장 지붕에 얹힌 'LOVE' 네 글자의 네온사인 등 없던 풍경이 등장했다. 동네 사람들이 준 헌 옷가지로 할머니들과 바느질을 해서 그늘막을 만들기도 했다. 빈 집 여섯 곳은 주민들이 준 사진과 편지, 물건 등으로 구성한 동네박물관, 작가들이 이 동네를 소재로 작업한 결과를 보여주는 동네미술관이 되었다.
군산 출신 시인들은 담벼락에 시를 썼다. 동네의 몇 안 되는 아이들은 작가와 함께 골목을 누비면서 동네에 필요한 것들을 고안했다. 노인들을 위한 햇볕 가리개, 만능의자, 또래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 등 저마다 생각해낸 것을 그림과 입체물로 빈 집에 전시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면, 흔히 뭔가 그럴듯하고 스펙터클한 변화를 기대한다. 하지만, 해망동 프로젝트는 그와는 거리가 멀다. 눈에 띄게 번듯한 것은 없다. 그저 남루한 모습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손길을 댄 게 대부분이다.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조심스런 접근법으로 작가들은 이 동네의 기억과 현재를 꼭 끌어안았다. 그것이 주민들에게 단지 추억을 돌아보는 장치가 아니라 오늘의 삶에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집을 동네미술관으로 내준 심승종(53)씨. 방 한 칸과 부엌만 남고, 무너진 담장 안에 잡초만 무성한 그의 집 마당에 작가 최진성씨는 작은 거울, 컴퓨터 화면보호기, 탁자 등 자질구레한 물건을 설치해 빈 집이 이야기를 품게 했다.
군산 시내에 살면서 가끔 이 집에 와서 쉬어간다는 집 주인 심씨도 내친 김에 작가의 권유로 작품을 만들었다. 빨간 플라스틱 고추장 통으로 만든 우편함, '심승종 동네미술관' 이라고 나무에 칼로 새긴 문패를 걸고, 마당의 녹슨 철판에 자작시 한 편도 직접 써놨다.
해망동 프로젝트는 공공미술이란 무엇이고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공공미술의 기능, 목표, 역할 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대형 건물이나 공공시설을 지을 때 조각이나 그림 몇 점 거는 게 공공미술의 전부인 줄 통했다. 그에 비해 주민이 참여해서 그들 삶의 일부로 미술을 품게 하는 이번 프로젝트는 중대한 진전이고 발상의 전환이다. 전국 11군데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험의 결과가 주목된다.
군산=오미환기자 mhoh@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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