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하정우는 조그만 필름 카메라를 지니고 나타났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디카(디지털 카메라)는 별 재미가 없어요. 사진 인화를 해도 깊이가 떨어지고요. 요즘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는 재미가 썩 괜찮습니다.”
하정우는 필름카메라처럼 아날로그 이미지가 강한 배우다. 빛의 속도로 떠올랐다가 빠르게 자취를 감추는 반짝 스타와는 거리가 멀다. 무덤덤한 듯 진득한 얼굴은 디지털 시대의 여느 젊은 배우와도 다르다.
그는 요즘 역설적이지만 조용히 잘 나가는 배우다. 지난해 윤종빈 감독의 독립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이래 김기덕 감독의 ‘시간’, 한미 합작영화 ‘네버 포에버’에서 잇달아 주연을 맡았다. 추석 대목 한 자리를 차지할 뮤지컬 코미디 ‘구미호 가족’에도 얼굴을 비쳤다. “‘구미호 가족’ 출연에는 개인적인 취향이 작용했어요. 판타지 성격이 강한 팀 버튼 영화를 제가 좋아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분야라는 매력도 있었고요.”
그는 누가 봐도 코믹한 역할 보다는 진지한 배역이 더 잘 어울릴만한 배우다. 그러나 그는 머리카락이 두피에 착 달라 붙은 헤어스타일로 천년 묵은 여우 일가의 꺼벙한 아들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매사 똑 부러지게 행동하는 군대 고참의 강인한 인상(‘용서 받지 못한 자’)도, ‘사랑의 미로’ 속에 갇혔지만 여전히 애인에게 헌신적인 남자의 모습(‘시간’)도 오간 데 없다. “망가졌다기보다는 역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죠. 예전 영화와 달리 저의 다른 면모를 보이고 싶었어요. 사실 대학 재학(중앙대 연극학과) 중에 이런 유의 연극을 해봐서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어요.”
스물 여덟 살의 적지 않은 나이. 그와 동년배이거나 나이 어린 배우들이 일찌감치 스타로서 광채를 뿜어내고 있을 때 조바심도 났을 만하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기만 했다. “한번도 제가 늦었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제 나름대로 꾸준히 연기를 해왔으니까요.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스타요? 저는 먼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의 아버지는 TV드라마 ‘전원일기’의 큰아들로 유명한 탤런트 김용건. 그는 추석 연휴에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에 출연한 아버지와 흥행 대결을 펼친다. 같은 길을 가는 부자지간이지만 집에서는 연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기를) 보는 기준도 틀리고 표현 방법도 틀리니까 각자 알아서 잘하자는 분위기에요. 그저 ‘운전 조심해라’ 그런 당부만 많이 하시죠.”
9년 가까이 연기를 위해 달려왔으나 하정우는 “이제 막 출발점을 떠난 마라톤 선수 같다”고 말했다. “겨우 1,2㎞ 뛴 격이에요. 다른 배우와 달리 저는 좋은 음식과 영양제를 먹으며 준비운동을 철저히 한 거죠. 운동화(작품)도 좋은 것으로 잘 골랐고… 배우는 정년이 없잖아요. 부족한 점은 아직 많죠. 연기는 실생활을 반영하는 거니까 좀 더 나은 인간이 먼저 돼야겠다는 생각 많이 해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그의 포부는 다부졌다. “다양한 장르의 여러 역할을 다 하고 싶습니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모든 배우의 꿈 아니겠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자리 잡고 싶습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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