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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0> 임재경, 마지막 지식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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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0> 임재경, 마지막 지식인 기자

입력
2006.09.2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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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최근호(90호ㆍ2006년 9~10월)를 읽다가 원로 언론인 임재경(70)의 ‘미국-이스라엘 제국주의와 헤즈볼라의 저항’이라는 글을 만났다. 얼마 전 이스라엘이 저지른 레바논 침공을 소재로 삼아 서남아시아 지정학을 살피며, 이를 한반도 상황과 슬며시 포개놓은 글이다. 이 어른이 아직 붓을 놓지 않았구나 하는 반가움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는 요즘도 내일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었다. 임재경이라는 이름은 내 초년 기자 시절을 들뜨게 한 역할 모델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어디에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내가 불민해진 것이 무참했다. 그 무참함을 억누르며, 그의 저서 ‘상황과 비판정신’(1983, 창작과비평사)을 오랜만에 펼친다.

‘상황과 비판정신’은 창비신서의 마흔다섯 번째 책으로 나왔다. 창작과비평사(지금의 창비사) 전기(前記)의 얼굴 노릇을 하던 이 시리즈에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시작으로 황석영의 ‘객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송건호의 ‘민족지성의 탐구’, 신동엽 전집을 거쳐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 이르기까지 이젠 고전이 된 책들이 여럿 끼여있다.

이런 책들이 워낙 큰 성가(聲價)를 얻은 터라 ‘상황과 비판정신’은 그 시리즈에서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고, 독자들은 그 책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독서 체험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상황과 비판정신’은 창비신서의 순금부분에 속한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인 직업 저널리스트가 쓴 최량의 저서 가운데 하나다. 분야가 달라 나란히 놓고 견주기는 어렵지만, 이 책은 실증적 전문성에서 송건호의 저서들에 앞서고, 논리와 균형감각에서 리영희의 저서들에 앞선다.

‘상황과 비판정신’이 나올 무렵, 임재경의 신분은 해직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쓴 글들과 신문사에서 내쳐진 뒤에 쓴 글들이 섞여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쓴 ‘엘리트의식과 직업의식’(1978)이라는 글에서, 임재경은 “신문과 대학이 그 조직의 공익성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정통분자를 몰아내고 나서 이에 대신할 새로운 엘리트를 찾는다는 사실은 냉소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지적한 바 있다.

1975년을 전후해 신문사들과 대학들에서 무더기로 쫓겨난 비판적 지식노동자들을 거론하며 한 말이다. 이 글을 쓰고 두 해 뒤, 그 역시 ‘조직의 공익성을 철저하게 주장하다 조직 밖으로 내몰린 정통분자’에 합류했다.

네 챕터로 이뤄진 ‘상황과 비판정신’은 그때까지 저자가 기자로서 지녔던 관심을 압축하고 있다. 그것은 경제와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이었다. 앞의 두 챕터에는 경제에 관한 글을 묶었고, 나머지 두 챕터에는 국제문제에 관한 글을 묶었다. 특히 제3부에 실린 ‘아랍경제론-통합과 연대의 한계’는 그 두 방향의 전문적 관심이 직조돼 태어난 글이다. 이 글만이 아니라, ‘상황과 비판정신’ 전반이 저널리스트의 전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며 쓰여졌다 할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의 성찰로 번득인다. ‘스태그플레이션과 제3세계의 누적채무’를 비롯해 제1부에 묶인 글들은 그 논리의 깊이와 실증성에서 논문에 가깝고, 아랍 현실에 접근한 제3부의 글 몇 편도 그렇다.

임재경은 현장 기자 경력 대부분을 경제 담당 기자로 채웠다. 1980년 신문사에서 떨려날 때, 그의 직책은 경제 담당 논설위원이었다. 삶의 동선이 자주 겹쳤던 그의 선배 기자 송건호나 리영희와 달리 임재경이 ‘스타 언론인’이 되지 못한 것이나, ‘상황과 비판정신’이 ‘민족지성의 탐구’나 ‘전환시대의 논리’만큼 젊은 독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그의 분야와도 관련 있을지 모른다. 경제는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지만, 경제에 관한 글만큼 재미없는 글도 없으니 말이다.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읽기 위해서도, 관심과 더불어 약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가 경제다. ‘자본론’이 마르크스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일반 독자들에게 가장 덜 읽히는 이유를 어쩌면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게다. 경제 저널리스트로서 젊은 독자들에게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로 근년에 타계한 정운영이 있지만, 그것은 정운영 특유의 화사하고 곡선적이며 사적인 문체에 힘입은 것이었다.

임재경에게는 그런 화사하고 곡선적이며 사적인 문체가 없었다. 아주 드물게 성찰적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아이러니나 유머를 끼워 넣기도 하지만, 임재경의 문체는 대체로 털털하고 정통적이다.

임재경이 제기하는 문제의 진지함에는 그런 정통적 문체가 더 어울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밋밋한 정통적 문체로 삶의 현장과 텍스트의 이 구석 저 모퉁이를 짚어나가며, 그리고 철저하게 객관적 수치에 바탕을 두고, 한국의 경제정의 문제를 따졌다. 그의 글이 선동이 아니라 설명과 설득이 된 것은 그런 표준 문체 덕분이기도 했다. 임재경은 스타일리스트가 되기를 마다하고 보편적 커뮤니케이터가 되는 길을 택했다.

‘상황과 비판정신’에 실린 경제 관련 글들이 죄다 전문적인 것은 아니다. 제2부에는, ‘생활 속의 경제’라는 그 제목이 드러내듯, 소위 생활경제에 접근하는 글들이 묶였다. 복지적 필요경비가 세액에서 공제되지 않는 한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은 도로가 되기 쉬움을 지적한 ‘영수증의 사회학’이나, 인플레와 ‘민생’의 관련을 따져보는 글들이 그렇다. 그가 일차적으로 학자가 아니라 기자였던 만큼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교적 가벼운 이런 글들에서도 경제에 다가가는 임재경의 일차적 관심은 ‘정의’에 있었다. 그리고 전문적인 글과 계몽적인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임재경은 진짜 지식인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교양인이면서 전문가였고, 교사이면서 논객이었다. 그가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만큼, 앞문장의 시제는 현재형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상황과 비판정신’에서 독자들의 ‘교양 욕구’를 자극할 글들은 외려 제3부와 제4부에 실려있다. 특히 아랍 현실을 분석한 제3부의 글들은 당시 한국 상황에서 선구적이었다 할 수 있다. 시오니스트들의 유대인의식이란 민족의식인 것 이상으로 특수한 계급의식이라는 점을 폭 넓은 자료로 실증한 ‘아랍과 이스라엘’(1974) 이후, 임재경은 이스라엘 제국주의와 아랍 문제에 지속적 관심을 보였다. 리영희에게 중국이나 베트남에 해당하는 것이 임재경에게는 소위 중동 문제, 곧 정복국가 이스라엘과 그 둘레 아랍 사회를 망라하는 서남아시아 문제였다.

한국인들이 지구 반대편 일로 여겨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아니 미국-이스라엘 동맹의 미디어 필터에 의존해 크게 뒤틀린 정보와 이미지만을 지녔던 중동 문제를 천착하며, 임재경은 그것이 곧 제국주의 식민주의 문제임을 명확히 했다. 그러니까 이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녹색평론’ 기고문이나,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즈음해 내일신문에 쓴 ‘60년 전쟁의 주역 이스라엘’(내일신문 7월27일치) 같은 글들은 그의 해묵은 관심의 연장이랄 수 있다.

(응석 삼아 투덜거릴 게 하나 있다. 아랍세계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던 1970년대에 임재경은 왜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을까? 물론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엔 방대한 아랍학 자료가 축적돼 있었고, 그는 프랑스어 자료와 영어 자료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문헌들은 2차 자료이기 십상이다.

이미 마흔에 이른 나이가 부담스러웠을까? 그러나 내가 듣기로 그는, 50대 중반에 이르러, 대학 교양독어 시간 이래 완전히 잊고 있던 독일어를 새로 익혀 그 뒤 자신의 독서 영역을 독일어 텍스트로까지 넓혀 왔다. 아랍어가 너무 난해한 언어로 여겨졌거나, 아랍 연구를 자신의 라이프워크로 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지레짐작은 한다. 그래도 한국 독자들에게 아랍세계를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한 기자가 그 쪽 방면 공부를 중도에서 접은 것은 아쉽다.)

‘상황과 비판정신’ 제4부 ‘현대사를 보는 눈’은 첫 두 글에서 드레퓌스 사건과 스페인 내전을 살피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임재경 자신이 그 일원인 지식인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녔다.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는 프랑스적 지식인 개념이 태어난 것이 드레퓌스 사건 때고, 그 지식인의 양심을 세계사적 규모로 시험한 사건이 스페인 내전이다. 임재경이 이 두 사건에 눈길을 건넨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지식인일까? 드레퓌스 사건 때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에 맞서 드레퓌스를 옹호한 사람들-우익 분자들이 경멸의 의미를 담아 ‘지식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 가운데는 신문기자가 여럿 있었다. 나중에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가 대표적 예다. 그런데 외국에서고 한국에서고, 이런 의미의 지식인-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기자 사회에서 거의 사라진 듯하다. 한국의 경우, 임재경 아래세대로서 그런 의미의 지식인 노릇을 하는 기자는 곧바로 떠올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임재경을, 그 세대의 몇몇 다른 기자들과 함께, 마지막 지식인 기자라 불러도 되겠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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