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전공한 노교수는 30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똑같은 과목을 강의했다. 30년을 사용하다보니 강의노트가 너덜너덜 해어졌다. 대학원생 조교는 노교수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타이핑해 컴퓨터 문서로 정리하면서 이렇게 권했다.
"선생님, 이참에 내용도 한번 정리하시죠?" 노교수는 무례한 제자를 한심한 듯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 '인문학 위기 선언'을 보고
필자가 다니던 대학원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화라고 믿는 대학원생이 더 많았다. '인문학 위기 선언'을 접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전설이었다.
나는 인문학 위기 선언이 그동안 학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단행하지 않은 것, 학문 후속세대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것, 사회의 통합은커녕 분열에 앞장선 것 등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될 줄 알았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보낸 10여년 동안, 내가 경험한 인문학의 위기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과정이 끝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인문학자가 처한 경제적 곤란은 위기가 될 수 없었다.
같은 국문학자끼리도 전공이 고전문학이냐 현대문학이냐에 따라 서로의 논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인간성 회복이니 사회적 통합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가 인문학의 존립 근거가 될 수도 없었다. 논문과 학술서는 전공자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엽적이고 난해했으므로, 대중의 무관심 역시 위기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젊음을 인문학에 바치면서 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생이 열심히 연구해 제출한 논문을 교수들이 대충 읽고 깎아내릴 때, 학술지 논문심사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때 절망했고, 신진학자의 새로운 견해가 학계의 낡은 기준으로 난도질당할 때, 후배들이 '형처럼, 교수들처럼 살기 싫다'고 하나둘씩 대학원을 떠날 때 절망했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자들이 '나태'를 '영혼의 자유'로 분식(粉飾)하려 들 때 절망했다.
● 해어진 강의노트부터 찢어라
아무리 '남 탓'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라지만,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청춘을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바치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이 아직은 대학원에 남아있다.
사회는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데, 인문학자는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독백만 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인문대 대학원에서 내쫓는 것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는 오만과 만용, 시대착오와 자가당착이다.
해어진 강의 노트는 찢어버려야 한다. 진리가 변하지는 않지만, 해어진 강의노트에 적힌 것은 진리가 아니다. 설령 진리라 하더라도,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에 내몰리면, 이 나라는 정말로 희망이 없어진다.
전봉관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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