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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끼리끼리'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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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끼리끼리' 수학여행

입력
2006.09.2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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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에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2박3일 경비가 정확히 750원이었다. 기억이 생생한 건 그 돈을 내기까지 아픔과 상처가 몹시 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또다시 경주로 갔다. 액수는 기억이 없다.

'수학여행=경주'가 됐지만 "다보탑이나 첨성대가 많이 낮아졌다(6년 동안 내 키가 커져서)"는 인식만 있다. 견문 넓히기는 뒷전이었다. 터널 속 캄캄한 열차 객실, 10명씩 지그재그로 누웠던 여관방, 선생님과의 밤샘 숨바꼭질, 2~3m 짜리 밥상에 조별로 둘러 앉았을 때의 행복감 등의 추억이 전부다.

■ 교육청과 각 학교가 운영 중인 지침과 내규 등을 종합하면 수학여행의 목적은 ▦학교 밖에서의 집단행동을 통해 건강ㆍ안전ㆍ사회 수칙에 대한 바람직한 체험을 하며 ▦사제와 학우가 함께 생활함으로써 청소년의 추억과 인상을 풍부히 한다는 것이다.

▦독특한 문화ㆍ경제ㆍ산업ㆍ정치 현장을 견학하고 수학(修學)한다는 것이 3대 목적 중 나머지 하나라지만 시쳇말로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영화 '신라의 달밤'은 수학여행의 체험과 추억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김상진 감독은 경주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보며 시나리오의 모티프를 잡았다고 했다.

■ '따로따로' 수학여행이 말썽이다. 일부 고교에서 행선지를 국내ㆍ일본ㆍ중국으로 구분하거나 국내라도 값에 따라 나눠 '끼리끼리 여행'을 간다고 한다. 특정 지역의 기후 때문이라거나 멀미가 심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돈 때문이라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부모의 경제사정을 고려했다는 그 학교 교사들은 정말 나쁘다. 학생들에게 10몇만원짜리 국내파, 60만원 짜리 중국파, 100만원짜리 일본파로 낙인을 찍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학교엔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콕파'로 남은 학생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 고교 때 돈 때문에 경주에 안 가겠다던 급우가 있었다. 얼마 전 만났을 때 '따로 여행'이 화제가 됐다. 그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경주의 추억'이 생생했다. 특히 "단체니까 몇 명은 공짜로 낄 수 있다고 귀띔하던 선생님 모습이 선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 연봉 10수억원을 받는 CEO로 남몰래 불우청소년들을 돕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와 다르다. 소란했던 추억은 MP3와 이어폰으로 대체됐고, 인터넷은 교사의 설명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의례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가정형편을 무시할 수 없다면 방식 개선은 물론 존폐 여부도 생각해 보자.

정병진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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