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이하 현)=키케로 선생님, 오늘 이렇게 모신 이유는 여러 가지 문제로 한국 사회가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즘 대학 입시에서 논술이 강화되는 추세인데요,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교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에게 많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고 있습니다.
키케로=오호, 논술이라…, 한국이 그렇게까지 글쓰기나 수사학을 좋아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네. 대입에서 논술 강화는 좋은 일 아닌가?
현=문제는 공교육 현장에서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거지요. 결국 비싼 돈을 들여서 사설 학원에서 해결해야 하니까요. 최근에는 이과 학생들도 논술 시험에 대한 부담이 커진 반면에 아직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거든요.
키케로=그건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어. 먼저 대학 교수들, 그러니까 자연대나 공대 교수들을 포함해서 모든 대학 교수들로 하여금 매년 논술 시험을 치르게 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성적이 나쁜 교수들을 강단에서 물러나게 하면 돼. 초ㆍ중등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논술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논술 및 글쓰기 과목을 필수로 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되는 거구. 교육인적자원부도 직제를 바꿔서 한국어 및 논술 담당 차관, 영어 담당 차관, 수학 및 자연과학 담당 차관- 뭐 이런 식으로 조직을 확 바꿔서 담당 공무원들의 근무 평정을 성과 위주로 하면 금방 해결 될 거야.
현=(허걱) 선생님, 굉장히 과격하시군요. 어쨌든 기회가 생기면 선생님께서 몸소 한국 국회에 나오셔서 지금 하신 얘기를 멋들어진 연설로 해주셔야겠네요.
키케로=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논술을 기능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무엇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습관을 어려서부터 길러야 하구,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출판 기획이라든가 공공 도서관의 장서 충당이라든가 학교의 수업 방법 등을 획기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거지. 교과서나 참고서는 물론이고 좋은 인문교양 서적이 많이 나오고 많이 팔리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평생 동안 수사학을 좁은 의미의 기술이나 기예로 전락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해 왔네. 그보다는 수사학을 한편으로는 철학 및 인문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사회 활동과 관련시켜서 이해하고 실천해 왔어. 내 수사학적 저작들이 대개 ‘이상적 연설가’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네.
현 선생님이 사시던 때 로마 사회에서는 정치적 의사 결정이 600여 명에 이르는 원로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공개적인 형사소송이 군인이나 평민으로 구성된 재판진이나 배심원단 앞에서 진행되었으니까 연설이나 변론 등의 수사학적 실천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교육과 정치적ㆍ사회적 실천, 혹은 좁게는 법률적 실천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소외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과 분리는 흔히 말하는 공교육의 위기라든가 인문학의 위기와도 연관이 되어 있는 문제구요.
키케로 이미 그러한 현상은 내가 살던 시대에도 있었어. 내가 강조했던 ‘이상적인 연설가’라는 게 결국 연설가와 철학자의 결합, 수사학 이론과 실천의 결합, 수사학과 철학의 결합, 윤리와 정치의 결합, 교육과 공적 활동의 결합을 추구하는 건데, 그토록 결합을 강조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심각한 분열 내지는 분리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거야.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어.
현 문제는 한국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보라는 점에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대부분은 엉뚱하게도 위기의 원인을 TV나 영화나 컴퓨터 게임이라든가 디지털 콘텐츠에 돌리고 있지요. 아니면 인문학의 위기와 대학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 둘은 서로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문제거든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쟁점(stasis)을 제대로 형성해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 위기의 핵심이지요.
키케로 그럼 대체 자네가 생각하는 인문학 위기의 원인은 뭔가
현 인문학이라는 게 삶의 문제를 탐구해 참된 삶의 길을 모색하는 학문이잖아요. 가령, 요즘 사람들이 TV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좋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게 요즘 삶의 문제라고 한다면 왜 사람들이 TV를 끼고 사느냐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하는 거죠. 그것을 TV가 문제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겁니다. ‘영상문화, 대중문화에 원인이 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왜 영상문화가 사람들을 사로잡느냐의 문제에 대답을 해야 인문학의 의의가 있는 겁니다. 대학 위기도 마찬가지지요. 대학의 위기를 곧장 인문학의 위기와 등치할 수는 없죠. 대학을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지요. 대학이 兩羚퓽막?전락했다면, 그것이 문제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왜 장사판이 됐으며 어떻게 하면 장사판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과연 우리에게 인문학이라는 게 있었느냐 하는 고민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릅니다. 인문학이 없었는데 인문학의 위기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키케로 냉소가 심하구먼. 그렇다면 나도 냉소적으로 한 마디 하지. 세상은 늘 바보들이 지배하는 거니까 그런 일에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네. 내가 수사학 이론에 관한 저작들을 라틴어로 쓴 것은 내가 살던 때에 라틴어 역사가 아직 짧은 시절이라서 한마디로 라틴어가 ‘가난했기’ 때문이었다네.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서 머쓱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를 거쳐서 라틴어는 풍부해지고 풍요로와졌다네. 자네의 한국어는 어떠한가?
현 뭐, 아직 ‘절라’ 궁핍한 단계입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 있지요.
키케로 학자나 문인의 언어적 실천만이 전부는 아니라네. 사람들이 쓰는 모든 말과 글이 다 수사학적 실천에 해당하는 거야. 정치인들의 말, 신문에서 기사 제목을 뽑는 거, 광고 카피를 만드는 것, TV 저녁 뉴스에서 기사거리를 배열하는 순서, 인터넷의 많은 댓글 등도 수사학 공부에서 아주 훌륭한 재료가 되는 거라네.
현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말을 꼽을 수가 있겠네요.
키케로 그분이 뭐라고 했는데?
현 이 대법원장은 ‘공판 중심주의’에 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려던 것이었다고들 하네요. 그런데, 결국 자기네 밥그릇 빼앗는 거라고 생각한 검사들과 변호사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려버렸지요. 지금은 당초의 의도 자체가 가려져버려서 엉성하게 봉합 되려는 것 같아요. 그 논의의 형식과 과정을 봐도 우리 인문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엿보이지 않습니까.
키케로 그렇긴 하네. 하지만 매사를 너무 그런 식으로 삐딱하게만 보지 말고 긍정적인 면도 보게나. 그래야만 사회의 주류를 설득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은가?
현 (머쓱해 하며) 과연 선생님이십니다. 철학과 정치의 결합, 수사학과 실천의 결합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결국 인문학부터 살리라는 얘기로 새겨듣겠습니다. 그럼, 멀리 못 나갑니다. 살펴 가십시오.
■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ㆍBC 106년~BC 43년)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법률가, 철학자, 수사학자, 문필가. 특히, 가장 뛰어난 라틴어 연설가 및 산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카이사르 암살(BC 44년) 후 공화정 체제를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끝내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보낸 군인들에 의해 살해됐다. 키케로의 아버지는 기사 신분 출신의 가죽 표백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키케로라는 이름은 이집트 콩을 뜻하는 라틴 단어 cicer에서 비롯된 것인데, 키케로의 조상 중에 코 끝이 이집트 콩처럼 생긴 사람이 있어서 유래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고 특히 시 짓는데 큰 재능을 보였으며, 십대 시절에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철학과 수사학 및 로마법을 배웠다. 그가 오늘날 남긴 방대한 문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연설문, 철학적 저작, 서간문이 그것이다. 연설문은 정치인 및 법률가였던 키케로의 공적 활동의 기록이자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서구 고전 산문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평가되는 서간문은 그가 친지 및 친척에게 보낸 것으로 약 800통이 남아 있다. 수사학에 관한 그의 저작들은 통상 철학적 저작에 통합되어서 다루어지지만, 정작 철학자로서 그는 여러 학설에 관해서 실용적이고 절충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견지했으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사학에 관한 이론적 저작들이다. 여기에는 ‘발견론’(BC 85년) ‘연설가에 대하여’(BC 55년) ‘브루투스’‘연설가’ ‘연설의 부분들’(세 권 모두 BC 46년), ‘변증론’(BC 44년) 등이 포함된다. 최근 ‘연설의 부분들’(Partitiones Oratoriae)이 한국키케로학회(회장 허승일)의 집단적 연구와 토론을 바탕으로 해서 서양 고전문헌학자인 안재원 박사의 번역에 의해 ‘수사학 -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도서출판 길)라는 이름으로 간행됐다. 이 번역본에는 우선 한국어 번역문이 나오고, 바로 아래에는 1994년 독일에서 간행된 라틴어본 원문이 있고, 마지막으로 비판적 해설과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치밀하고 꼼꼼하고 섬세하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또한 비판적 해설과 주석은 키케로의 다른 저작들은 물론이고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 문헌들을 전거로 삼아서 본문의 해당 부분과 관련된 인문학적 맥락과 배경과 영향관계를 상세하고도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번역자의 학문적 내공과 지적 성실함이 돋보이는 번역 및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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