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잠은 안 오네. 올 턱이 없네. 우리는 청계천변을 걷고 있으니. 서울 강북에 걸을 만한 길이 워낙 없다보니 하염없이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만만한 게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천변로다.
개천과 어둠 너머 저편에 지하철 역사가 보이는 성동구 어디쯤이었다. 텅 빈 놀이터를 만나 누구는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누구는 그네를 타고 누구는 10여m 떨어진 둔덕의 화장실에 갔다. 그런데 화장실에 갔던 남자후배가 급히 돌아왔다. 표정이 뒤숭숭했다.
"이상한 사람이 있네요." 바지를 내리고 알몸을 드러낸 남자가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야, 여자들끼리는 못 다닐 길이로구나. 남자도 겁을 먹는 판에. 잠시 후, 웅성거리는 우리 앞으로 그 쓸쓸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비척거리며 어색하게 지나갔다. 그제야 후배는 다시 화장실에 갔다.
돌아온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해였나 봐요. 변소가 너무 지저분해서 바지를 더럽히지 않으려면 엉거주춤 나올 수밖에 없었겠어요." 그 남자야 말로 그 시간에 거기 누가 들어올 줄 몰랐다 낭패를 본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우두커니 걸을 일밖에 없는 그 순한 길.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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