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동네에서 서자 취급 받던 사진이 당당하게 뜨고 있다. 굵직굵직한 사진 전시나 관련 행사가 줄을 잇고 있고, 사진 작품이 어지간한 그림보다 비싸게 팔리는가 하면 전문 화랑이 늘면서 판매대행사까지 생겼다.
20일(현지시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배병우의 소나무 시리즈 중 한 점이 한국 작가의 사진 작품으로는 사상 최고가인 6만4,800 달러(6,123만원)에 팔렸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어, 사진도 팔리네? 뭐, 한 장에 6,000만원이 넘는다고?
국내 미술 지평에서 사진의 부상은 최근의 일이다. 배병우의 소나무 시리즈는 3년 전만 해도 1,000만원 대였으나 올해 들어 3배 이상 뛰었고, 외국에서는 더 높은 대접을 받는다. 황규태 구본창 김중만 민병헌 등 유명 작가의 작품 값은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올라 1,000만원 안팎에서 2,000만원대까지, 김상길 정연두 등 젊은 작가의 작품도 보통 수 백 만원에 팔리고 있다. 최근 미국으로 진출한 사진작가 김아타의 뉴욕 전시가 뉴욕타임스에 대서 특필되는 등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작가도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옥션은 최근의 사진 붐을 반영, 다음 주 103회 경매에 사진과 판화를 묶은 별도 섹션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지금까지 국내 경매에서 사진은 독립되지 않은 채 어쩌다 한두 점이 나왔을 뿐이다.
사진 붐을 보여주는 또다른 현상은 사진 전문 미술관과 화랑, 판매대행사의 등장이다. 2002년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문을 연 데 이어 뤼미에르 갤러리, 김영섭사진화랑, 갤러리 룩스, 갤러리 나우, 갤러리카페 브레송, 화이트 월 갤러리(이상 서울), 갤러리 와(경기 양평군) 등이 생겨 사진예술 대중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4월 문을 연 트렁크 갤러리는 국내 최초의 사진 판매 대행 에이전시. 원로부터 신진까지 국내 대표적 사진작가 40명의 작품을 위탁 받아 수집가들과 연결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트렁크 갤러리가 예술사진을 찾는 전문 수집가들을 겨냥한 것과 달리 7월부터 사업을 시작한 ㈜로드비주얼은 집안이나 사무실에 큰 부담 없이 사진을 걸고 싶어하는 일반인을 상대로 저렴한 작품을 판다. 이 업체가 운영하는 사진 장터에서는 지난 7월 30만~80만원대 작품 113점 중 30%가 팔렸다.
박영숙 트렁크 갤러리 대표는 “회화를 모으던 수집가들이 사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면서 그런 변화의 요인으로 현대미술의 큰 흐름 외에 영상 세대의 성장과 생활 공간의 변화를 들었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40, 50대가 TV를 보고 자란 영상 세대여서 사진 이미지에 친근감을 갖고 있고, 주거공간이나 사무실에 걸 작품으로 회화보다는 현대적이고 심플한 사진 작품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장식성이나 취미를 넘어서 사진이 예술로서 대중 깊숙히 파고들었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인사동과 충무로의 총 8개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사진페스티벌의 기획자 김남진(갤러리카페 브레송 대표)씨는 “국내 미술 시장에서 사진은 초기 진입 단계”라고 진단한다. 고가에 작품이 팔리는 작가는 극소수이고, 전문 화랑이나 미술관 등 인프라는 턱없이 모자라며, 대중이 사진을 제대로 알고 즐기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사진이 인기를 끈 지 오래다. 주요 아트페어나 소더비, 크리스티의 현대미술 경매는 사진의 비중이 50~60%를 넘는다. 올해 2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작품 ‘달밤의 연못’은 무려 290만 달러(29억원)에 팔려 사진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박영숙 트렁크 갤러리 대표 "수집가는 사진작가의 후원자"
서울 남산의 소월길 도로변에 한국사진의 보물창고가 있다. 국내 대표적 사진작가 40명의 작품을 서랍장에 차곡차곡 모아둔 ‘트렁크 갤러리’. 카센터로 쓰이던 10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한 곳이다. 근사한 전시장이 아니고 허름한 수납 공간이다. 국내 여성 사진작가 1호, ‘사진계의 대모’로 불리는 박영숙(65)씨가 운영하는 이 곳은 작가들이 맡긴 작품들을 수집가들에게 소개해서 판매한다.
“사진운동 차원에서 4월에 문을 열었어요. 무엇이 진짜 작품 사진인지 보여주고 제대로 안내해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에요. 대형 화랑은 ‘잘 팔리는’ 사진만 취급하고 작가도 몇 안 돼요. 진정한 예술사진을 원하는 수집가는 많은데, 작가와 연결이 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곳을 찾는 수집가들은 대개 작가와 작품 연구를 끝내고 와서는 어떤 작가의 것이 돈이 되느냐, 그의 작품 중 어느 시리즈가 특히 살 만하냐고 묻는다. 작품을 추천해주고 안내해주는 것이 박 대표의 일이다. 매달 한 차례 여기서 여는 작가와의 대화에는 사진 전공 학생부터 일반인과 수집가에 이르기까지 40, 50여 명이 참여한다.
그는 국내 미술에서 변방에 머물던 사진이 중심부로 진입한 계기로 1991년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사진의 수평’전을 든다.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작가들이 중심이 된 이 전시는 국내 최초로 사진과 미술의 동격을 선언하며 사진도 예술이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렸다. 그 전까지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고 보거나 다큐멘터리 사진만이 사진의 전부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수집가는 문화 후원자입니다. 그들의 투자 덕분에 작가들이 작품을 재생산할 수 있지요. 수집가들이 우리 작가들에 좀 더 관심을 보이면 좋겠어요. 우리 작가가 외국에서 뜨면 그제서야 인정을 해주고, 같은 값이라도 외국 작품을 사야 나중에 오를 거라고 믿는 분위기가 많은데, 그런 문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도 됐어요. 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02)797-2314
오미환기자
■ 올 가을엔… 사진을 만나자
올 가을은 어느 해보다 대형 사진 전시와 관련 행사가 많다. 사진예술을 만나러 가는 나들이를 추천한다.
▲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인사동의 7개 화랑과 충무로의 갤러리카페 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과 대중의 즐거운 만남을 표방한 국내 첫 사진 축제다. 원로부터 신진까지 100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관객도 많아 제법 흥겹다. 현대사진의 다양한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 외에 작가와의 대화, 야외 디지털 영상쇼, 관객들의 모바일 사진전, 사진장터가 진행 중이다.
핵심 전시인 ‘울트라 센스’ 전(토포하우스, 관훈갤러리, 인사아트센터)은 상식과 전통을 뛰어넘거나 톡톡 튀는 작품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사진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포토 루덴스’ 전(덕원갤러리),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영 포트폴리오’전(갤러리 나우, 갤러리 룩스), 원로작가 김한용 초대전(김영섭사진화랑)도 있다.
관객 참여 행사로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컬러메일로 보내면 인사동 곳곳에 설치한 디지털 액자에 바로 사진이 뜨는 모바일 사진전, 15만원 균일가의 소품 사진과 사진 도서를 40% 정도 싸게 살 수 있는 장터(관훈갤러리 특관)가 인기다. 26일까지. www.sipf.net, (02)2269-2613
▲ 서울국제판화사진아트페어
판화와 사진 작품을 파는 큰 장터다. 2회째인 올해는 13개국의 화랑, 공방, 관련업체 등 60여 곳이 참여해 27~30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장을 벌인다. 출품작 2,000여 점 가운데 사진은 800여 점. 사진 작품 값은 100만~1,000만원 대다. 예술가의 얼굴 사진전을 따로 열고 사진미술 특강도 한다. www.sippa.org, (02)521-9613
▲ 대구사진비엔날레
10월 17일~31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시민회관, 대구 EXCO 등에서 열리는 국내 첫 사진 비엔날레. ‘다큐멘터리 사진 속의 아시아’를 주제로 세계적 사진작가 스티브 매커리 초대전, 마이클 울프 등 10여 개 국 유명 작가 33인전을 하고, 특별전으로 국내 주요 작가 23명의 ‘사진 속의 미술 & 미술 속의 사진’ 전, 대구 지역 사진 작가를 조명하는 ‘대구 사진의 역사 산책’전도 연다. www.daeguphotobiennale.org, (053)601-5084
▲ 프랑스 명작 사진전
26일~10월 29일 갤러리 뤼미에르. 프랑스 근대 사진의 3대 작가로 꼽히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윌리 호니, 로버트 드와노의 명작을 비롯해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자 만 레이의 대표작, 파리와 파리지엔을 담은 유진 아제, 자크 앙리 라티크의 사진, 에밀 사비트리와 이지스의 매력적인 패션사진까지. www.gallerylumiere.com, (02)517-2134
▲ 우리 사진의 역사를 열다
한미사진미술관의 확장 개관 기념전. 23일부터 12월 22일까지 한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에 이르는 한국 사진 초창기, 귀한 기록 사진들을 모았다. 조선 왕실부터 일반 서민의 모습까지 한국의 근대가 그 안에 담겼다. 의친왕 아들 이 우의 서양식 결혼식 사진, 기생과 고위 관리, 교육기관과 사회단체 행사, 돌 회갑 결혼 장례 등 통과의례, 구한말 궁궐과 시가지 풍경 등. www.photomuseum.or.kr, (02)418-1315
오미환기자
■ 유명작가는 한 작품 10장 정도만 찍어
사진은 복제예술이다. ‘같은 것을 몇 장이고 찍을 수 있으니 희소성이 떨어져 투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한 작품을 몇 장만 찍는다고 제한하는 ‘에디션’이라는 게 있다. 예컨대 해외 경매에서 신기록 수립 행진 중인 배병우씨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에디션은 보통 10장 이내다. 사겠다는 사람이 나와도 더 이상 찍지 않는다. 같은 에디션이라도 나중에 팔리는 것일수록 비싸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더 찍은 것이니 수요를 반영한 결과다. 따라서 이왕 사진 작품을 살 바엔 일찍 사는 게 좋다.
사진을 살 때 확인해야 할 점들이 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공부 외에 에디션이 몇 장인지, 한 에디션의 작품들이 어디 어디 누구에게 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다. 다음은 작가의 서명. 손으로 쓰기도 하고, 종이에 볼록 튀어나오게 압인을 찍기도 한다.
액자도 작품의 일부다. 전통적인 유리 액자 외에 요즘은 ‘디아섹’이라는 게 많이 쓰인다. 디아섹은 투명 아크릴판에 사진을 압착, 유리를 끼웠을 때처럼 어른거리지 않아 이미지가 선명하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디아섹은 비싸다. 이 기술을 갖고 있는 독일 회사로 작품을 보내서 액자 작업을 한 뒤 다시 국내로 들여와야 하기 때문이다. 디아섹 1.5 X 2.0 m 크기면 200만원쯤 한다. 요즘 사진 작품이 비싼 이유에는 디아섹 값도 한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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