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딸에 매혹… 20년 공력 쏟았죠"
“중세적 질서에 예속된 궁중 무희가 근대적 질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놀랍게 성장해가는 과정이 제 30대 후반과 겹쳐졌습니다. 혼자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는 삶, 나도 그렇게 생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소설을 쓰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죠.”
소설가란 인물을 창조해내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인물들은 소설가의 머리 위에 올라 앉아 제 주인을 조종하기도 한다. 소설보다 소설적인 삶을 살다간 실존 인물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은데, 이 여인, 리심(梨心)도 그 중 하나인 듯싶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두 작가를 동시에 사로잡아 꼼짝없이 펜대만 쥐고 있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재주 많은 이야기꾼 김탁환(38) 한국과학기술원(KAL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가 프랑스 외교관의 아내가 된 조선 궁중무희의 비운의 삶을 재현한 세권짜리 장편소설 ‘파리의 조선궁녀 리심’(민음사ㆍ각 9,500원)을 펴냈다. 같은 소재를 다룬 신경숙씨의 소설이 한 일간지에 연재 중이라 공교로운 겹침에 많은 이목이 쏠렸던 터다.
리심은 궁중 기생의 신분으로 초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과 사랑에 빠져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과 아프리카 땅을 밟았던 19세기말의 실존 인물. 프랑스 공사의 아내가 돼 근대문물과 질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근대의 딸로 새롭게 태어나지만, 1896년 남편이 조선의 프랑스 공사로 재부임한 후 궁중무희로 복직되면서 봉건적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금조각을 삼켜 자결하고 만다.
1년 반 전부터 집필에 들어갔다는 작가는 이 소설을 ‘발’로 썼다. 리심에 관한 기록이라곤 2대 프랑스 대사 프랑뎅의 회고록에 나오는 몇 줄이 전부였지만, 일본 도쿄, 프랑스 마르세이유와 파리, 모로코 탕헤르 등 이들 부부의 행로를 한 달간 샅샅이 뒤져 빅토르 콜랭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을 찾아냈다. “김윤식 선생님이 공부는 발바닥으로 하는 거라고 늘 주장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더군요. 최대한 리얼리즘적으로 쓰려고 했어요. 문서 자료만 뒤져서는 도저히 쓸 수 없었던, 20년간 배운 모든 공력을 쏟아부은 작품입니다.”
문체나 사유보다는 이야기가 승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쉽고 재미나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기획 단계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씌어져서인지 장면 묘사와 사건에 대한 서술이 간결하고 명징하다. ‘이야기’의 귀환을 고대해온 독자들에게 특히 반가울 소설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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