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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김정환 새 시집 '레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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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김정환 새 시집 '레닌의 노래'

입력
2006.09.2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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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피는 없다, 희망은 남았다

삶의 비루(鄙陋)와 혁명의 이상은 어떻게 환멸 없이 화해할 수 있을까.

시와 혁명이 한 몸임을 바로크풍의 웅장하고 화려한 곡조로 노래해온 시인 김정환(52)씨가 새 시집 ‘레닌의 노래’(문학 판ㆍ6,000원)를 출간했다. 2003년 발표한 ‘하노이-서울 시편’이후 3년 만이다.

시, 소설, 평론, 인문 교양서 등 전방위에 걸친 정력적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몸과 영혼이 풍요한 다산의 옥토임을 자랑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 저항과 절망을 넘어서는 화해와 희망의 시편들을 담았다. “인간의 조직이 일순 너무나 아름다웠던/시절은 화음의 광채로만 남아/생애가 차라리 슬프다는 풍문에 달”(‘레닌의 노래’)했지만, 노래와 춤과 음악으로 “멀쩡해지는”, “삶의 폭압을 감당하는 시간”(‘멀쩡해지는 시간’)도 거기엔 있다.

1980년대는 오히려 희망이었다. 혹독했지만 “정치가 우리들 봄날의 대지를 갈아엎는/아름다운 미래 전망이던 때”였고, “인간이 발명한, 인간적인, 인간적이므로 찬란한/삶의 질을 높이는 첩경이었던/정치가 있었”(‘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희망의 원리이자 토대였던 혁명의 추억은 시의 원형을 이루며 단 한 번의 호출로 언제라도 현재 속에 재생된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멸망은 어디로”(‘레닌의 노래’) 사라졌다. 영광과 좌절만 사라진 게 아니라 이제 그 멸망마저 사라지고 잊혀졌다.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조금씩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풍경 속으로 내려앉으며/겹치고, 덜컹댔”고,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그 질문은 결코 메마르지 않는다”.

시인이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고유명사에 이르는가 고유명사는 이미/언어 너머 언어의 길을 품고 있으나/일상의 영토도 거느리고 있으나//생활은 벌써/세상을 건너는/고만고만한 비만의 다리 되었으나”(‘고유명사의 길’)라고 한탄할 때, 고유명사는 대명사로 바꿔부를 수 없는,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구체적이고도 고유한 그 무엇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말씀의 의미가 몰락하고… 추신은 농담”(‘멀쩡해지는 시간’)인 시대, 그 오롯한 정수에도 일상과 생활의 비계가 끼고, 우리는 “생계와 화해한/만큼만” “가난하고 안온하다”.(‘레닌의 노래’)

그러나 희망의 시인은 이 비루한 화해에서도 종내 희망을 찾아낸다. “생각해보면/역사가 발전을 안 해왔던 것은 아니다/…헛된 것은 없다 처절한 죽음도 죽음의 영역을 넓히지 않고/우리 가슴에 역사의 무지개로 스며들었다…//따져보면/희망이 빛을 바랬던 적은 없다/희망은 역사 바로 그만큼/고전적으로 젊어져왔다/젊음의 고뇌와 역사의 고뇌가/중첩되는/시대를 우리는 지나왔다/그리고/시대는, 젊음은, 시대의 젊음은/그것으로 더욱 찬란하다.”(‘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서정과 정치가 뜨겁게 살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김정환의 사회적 서정성은 이번 시집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지평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전태일 흉상글과 전태일 거리 명판글, 민주화운동가 홍성엽의 묘비명 등이 묶인 2부 ‘언어의 악성’과 가사를 위촉받고 씌어진 3부의 ‘사랑노래’연작이 1부 ‘풍경의 나무’에 묶인 시들의 밀도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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